티켓현장수령으로 하고 갔는데 스텝이 사고가 나서 공연이 안된다하더라구요. 사전 공지도 없고.. 인터파크측에 연락해서 예매취소 후 환불해주시기로 했는데 어떻게됐는지요?

식을 줄 모르는 불쾌와 패러디의 카오스
- 우리는 아직도 프란츠카프카를 넘지 못했다.


특정 시대에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사람, 모든 면에서 완벽히 시대에 묶여 있는 사람은 동시대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시대를 쳐다보지도, 확고히 응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 조르조 아감벤, <벌거벗음>에서 -

‘사람’이라는 단어를 ‘연극’으로 바꾸어 놓는다. “특정 시대에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연극, 모든 면에서 완벽히 시대에 묶여 있는 연극은 동시대 연극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때문에 그 연극들은 시대를 쳐다보지도, 확고히 응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구더기가 들끓는 우리의 병든 삶을 청사진처럼 보여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신만의 단독적인 작품을 창조해 내기는커녕 오히려 현 자본주의에 걸맞게 시대에 딱 달라붙어 철학, 그리고 인문정신 없이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화려한 껍때기의 형식으로, 사람들의 감각에 모르핀을 주입해버리는 대중상업예술문화가 판치는 이 비겁하고도 반성 없는 슬픈 형국에, 프란츠 카프카의 詩(그의 작품은 소설로 구분 하지만 읽어보면 이성복 시인의 말마따나 시나 다름없다. 시대현실상황에 짓눌린 카프카 자신의 비참한 모습과 내면을 자기만의 형식으로 묘사하고 응축했기 때문에, 짧은 문장이라도 긴장감이 흐르고 있어 산문처럼 편하게 훑어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만큼 시에 가깝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70년대 후반 배우 故추송웅씨가 최초로 연극화한, 작품 ‘빨간 피터의 고백’이, 거리의 플라타너스가 문명으로부터 가위질 당해도, 이파리를 뿜어내는 것처럼, 어둠을 뚫고 다시 무대 위로 올라왔다.

나는 약 2년 전 쯤, 인터넷으로 한 철학자의 문학강의를 듣다가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알게 되었다. 23살, 그 철학자를 통해 프란츠 카프카를 알게 되었고, 소개가 어찌나 강렬했던지 카프카에 대해 알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처음으로 소설 ‘변신’을 읽었다.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 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라고 카프카 자신이 그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썼듯이, 정말 그의 작품은 나의 언 마음을 깨드리지는 못할 망정 엄청난 충격을 가해주었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모습을 통해 나의 모습을 보았고 지금 시대에도 그레고르 잠자 같은 인물들이 넘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고로 20세기의 위대한 작가 프란츠카프카가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겉 생활형식은 다를지 몰라도 여전히 인간의 비참한 현실은 그대로라는 뜻이다. 아직도 프란츠카프카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씁쓸한 증거이기도하다.
나는 생활 현실에 매몰된 탓인지 ''변신''이후로 그의 작품을 몇 보지는 않았지만, 틈이 날 때마다 간신히, 그리고 조금씩 그의 단편 소설들을 보게 되었다. 그 중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변신’ 보다 짧은 단편이지만, 거기엔 더 근본적인 인간의 남루함이 담겨있었다.

카프카를 알게 되어도 현실은 자꾸만 나를 짓눌렀다. 나의 감정과 마음은 책마저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다시 꽁꽁 얼어붙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말을 빌려 완전 ‘마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너무 나약해진 탓으로 한때 컴퓨터 게임이나 인터넷 동영상 같은 가상현실에 빠져 버렸고, 일도 안하고 집에서 먹고 싸기만 하며 퍼질러 지낸 때도 있었다. 심지어 그 죄책감으로 인해 우울증에 빠져 버리고 말았고, 결국 자살충동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나의 자살소동으로 가족마저 붕괴직전까지 갔었지만 김수영 시인이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인지, 흐르는 시간의 힘으로 다시 회복되기는 했다.
나의 삶은 조금씩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책도 조금씩 보기 시작했고, 위대한 작가들의 발끝에도 못 미치겠지만, 나의 나약함을 조금씩 직시하며 글을 통해 드러내기도 했다. 독립을 위해 일을 하면서 말이다. 나는 글쓰는 것을 좋아한다. 꿈이 시인이다. 언젠가 글을 쓰기 위해선 부모로 부터의 경제적, 정서적 독립은 불가피하다고 일종의 나만의 예술철학(?)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정서적 독립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경제적 독립, 자본주의체제의 노동은 역시 고역이었다. 공장, 어장, PC방, 건설현장, 빵집, 카페를 전전하며 갖가지 일을 시도 해보았지만 그나마 나에게 맞는 노동은 편의점 일이었다. 그렇게 약 3년 정도의 시행착오와 방황 끝에 나에게 맞는 노동을 찾았고 동시에 노동이 아닌, 돈과 관련되지 않은 진짜 내가 좋아서 하는 순수한 (창작)‘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독서와 글쓰기를 말이다. 사실 이렇게 확고하게 생활을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연극 보기 바로 한 달 전 부터니까.
지금도 매 순간 마다 자살충동이 일어나지만, ‘죽기 전에 시인처럼 자신만의 글은 남기고 죽자’고, ‘시집 한 권은 내고 죽어야 하지 않겠냐’고 오래전부터 스스로 다짐한 후로는 금세 사라지곤 한다. 어느 철학자가 그랬지만 인간은 사람이든, 어떤 예술이든, 꽃이든 강아지든 물고기든 별이든 간에 진짜 사랑하는 것이 생기면 자살하고 싶어도 못하는 법인것 같다. 사랑, 인간에게는 구원이자 삶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그래도 노동은 노동이다. 아무리 편의점일이 나에게 맞아도 결국, 시대의 매서운 바람임에는 틀림없으며 항상 마음을 꽁꽁 얼려 놓는다. 나는 매번 거기에 ‘도끼’질을 하려고 책이나 음악같이 혼자서 틈틈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을 접하려 했다. 그런 와중에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발견 한 것은 나에게 정말 행운이었다.

평소 나는, 그나마 한국에서 진지한 예술작품을 많이 접할 수 있는 곳은 대도시 서울 밖에 없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마크로스코’전만하더라도 서울에서 열렸지 않은가. 물론 게으른 탓이 크긴 하지만 덕분에 서울에 비하면 촌동네인 포항에 소극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지냈다. 12월 초 그러니까 내가 생에 처음으로 연극을 만나기 약 2주 전 쯤, 시내에서 볼일을 다 보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옆 전봇대에 ‘빨간 피터의 고백’을 홍보하는 깃발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포항에 소극장이 있다는 것에 처음 놀랐고,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빨간 피터의 고백’을 공연한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지방에선 예술을 제대로 향유할 수 없다는 나의 선입견과 절망감에 카프카가 말한 그 ‘도끼’가 내려쳐진 것이다. 나는 홍보 깃발을 보자마자 기뻐할 수밖에 없었고, ‘중요한 작품이다 이건 무조건 봐야한다’는 심정으로 인터넷에 예매를 하려고 했지만 공연검색조차 되지 않았다. 당시 내가 홍보깃발을 발견한 때가 공연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아직 공연 첫날이고 포항에 소극장이 있다는 것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인터넷에 안 뜨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서 너무 다급한 마음에 소극장에 직접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그 다음날에도 다음 날에도 다음 날에도 인터넷에는 뜨지 않았고 전화도 역시 받지 않았다. 나는 93년생인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연극이라 그런지 오래돼서 인기가 없거나, 아니면 카프카 특유의 문체 때문에 읽기 어려운 작품이고, 설령 그것을 알아도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보기 불쾌한 탓에 사람이 별로 없어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둥 오만 망상에 사로잡혔다. 결국 그냥 예매가 끝난 줄 알고 좌절하고는 생활현실 속에 ‘피터’를 묻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일터 편의점에서 손님이 없는 때, 카운터에서 잠깐 쉬고 있는 도중 지진처럼 불현듯 연극 생각이 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바일을 통해 예매사이트로 다시 들어가 보았는데...이게 웬걸! 예매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질렀다.
25살, 나는 카프카의 소설 ‘성’의 남자 주인공 K처럼 사랑을 무서워하는 성숙하지 못한 인간인지라 아직 연애 한번 해보지 못했지만, 마치 애인을 기다리는 기분인 것 같았다. 예매 하고 나서 그만큼 설레었다. 관람전날까지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도 다시 읽어 보았다. 그 ‘도끼’의 충격은 여전했고, 현실에 달라붙어 응시하지 못하는 나의 노예 같은 삶을 보도록 하기에, 카프카의 문체를 보며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원숭이 피터가 인간을 흉내 내고 이제는 아예 그 길들여짐의 과정인 ‘출구’로 빠져나와 자기가 진짜 인간이 된 것에 만족하는 부분들을 보면서 웃음까지 터뜨렸다. 물론 웃기긴 하지만 그 바닥에 씁쓸함은 있다.
카프카의 친구들이 작품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는 카프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처음에 나는 카프카의 작품을 웃음기 없이 굉장히 무겁게 봤다. 하지만 내가 웃음을 터뜨렸을 때, 비로소 카프카를 제대로 접했던 것일까. 카프카의 친구들처럼 그 블랙코미디적인 것을 나도 작게나마 느낀 것이다. 슬플 때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슬프고 우울하고 비참할수록 유머를 뽐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역설적인 상황 때문에 웃기지만 오히려 더 슬프게 다가오는 것 아닌가. 민감한 글쟁이답게 카프카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카프카의 문학작품을 상상 속이 아닌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형상화된 연극을 본다면, 카프카의 말을 빌려 나의 ‘언 마음’에 내려쳐진 그 ‘도끼’의 ''충격''은 책에서 본 그것보다 얼마나 클 것인지, 혹은 감당할 수 있을지 한 편으로 걱정까지 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 날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공연관람 날이 다가왔다. 새벽까지 일하고 불면의 방황에 시달리다 아침 늦게 잠 들었지만, 공연시작 약 한 시간 반 전에 맞추어 놓은 알람에 벌떡 일어나 밥도 먹지 않은 채 서둘러 씻기만 하고 소극장으로 가기위해 버스정거장으로 나섰다.
공연 시작하기 약 20분 전 소극장 ‘백 씨어터’에 겨우 도착했다. 극장은 시내의 낡은 건물 2층(매표소 및 관객대기실)과 3층(공연장)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2층에 들어서자마자 서늘한 기운이 몰려왔다. 입구 바로 정면의 매표카운터로 보이는 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입구 왼쪽에선 공연을 보러온 20대 남자 한 명만 작은 복도를 둘러 다니고 있었고(처음에 남들과 좀 달라 보이는 그의 개성적인 헤어스타일 때문에 단원인줄 알고 인사하려고 고개를 살짝 숙이다가 빛의 속도로 낌새를 차리고는 서서히 다시 올렸다.) 그 복도에 위치한 사무실 안에서 웬 남자가 전화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입구 쪽 천장의 한 부분은 짐승이 물어뜯은 것처럼 어른 몸뚱이 두 명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나무갈비뼈가 훤히 드러나 있었고 어디에서 새는 것인지 그 뼈에서 물방울들이 똑 똑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는 그 물방울을 받고 있는 스티로폼 상자와 양동이가 있었고, 입구 바로 오른쪽에는 관객들이 편하게 대기할 수 있도록 놓아진 접이의자 대 여섯 개가 나열되어 있었으며, 반대쪽만 켜진 전등으로 인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의자 그 뒤의 넓은 공간에는 연극소품들과 골동품들이 놓여 있었다. 마치 창고 같았다. 포항 토박이인 나는 포항시내에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오래된 건물인 것을 알고 있었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서울에 비하여 포항은 소극장 문화가 그리 활발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아론적인 철없는 몽상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한 번도 가 본적 없지만 소극장의 허기짐을 조금 예상하긴 했다. 미리 그러한 모습을 그려본 탓인지 소극장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지는 않았다. 것보다 20세기 위대한 작가 프란츠카프카의 작품이 연극되는 곳인데 흠잡을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겉으로 초라해 보이는 사람도 영혼과 정신만 높으면 아름다워 보이고 심지어 위대해 보이는 법이다!
도착한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회색과 노랑인지 녹색인지 밝게 염색된 생머리의, 캡모자를 쓴 청초한 여성 한 분이 들어왔다. 공연 관계자 분이셨다. 그분이 들어와서 말하길, 토요일에는 공연이 4시와 7시에 있는데 내가 예매한 4시 공연은 관객이 너무 없어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7시에는 공연이 가능하니까 그때 보러 와 주길 안타깝게 동의를 구하셨다. 나는 주말이고 해서 시간도 많으니 흔쾌히 수락하고 소극장 건물 옆에 있는 카페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카프카의 단편들을 보며 말이다.
공연을 시작하기 30분 전에 다시 극장 건물 2층으로 들어갔다. 그때는 카운터에 여성분이 대기하고 계셨다. 그 시간대 내가 처음으로 표를 받는 것 같았고, 객석 배치도에는 무대 정면의 정 가운데인 1번 좌석에 나의 자리가 표시되었다. 사실, 나는 무대 바로 앞에 앉는 것을 내심 꺼려했다. 나는 내성적이라 평소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해서 무대공포증마저 있기 때문에 혹 배우의 연기나 진행으로 무대에 올려 질까봐 그에게 쉽게 표적이 될 수 있는 맨 앞자리는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관객도 별로 없고 해서 이번만큼은 용기를 내었고, 은근히 맨 앞자리를 강요하는 여성분의 말에 못이긴 나의 거절 못하는 소심함도 작게나마 합세해서 결국 맨 앞자리를 선택했다.
표를 받고 연극과 극장에 대해 그분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곳에 온지 얼마 안 되었고 2층은 아직 꾸미고 공사 중인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 둘 관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공연을 관람한 인원은 나를 포함해 대 여섯 명쯤 되었다. 시간이 되고 드디어 공연장에 입장했다. 3층 공연장 안은 제법 극장다웠다. 하지만 100명쯤 앉을 수 있는 공간에 내가 앉은 맨 앞자리 뒤에로는 텅 비었고, 입구 옆 음향과 조명을 컨트롤하는 방안에는 중년 아저씨 한 분이 유리창 너머 쓸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면 무대의 왼쪽엔 ‘피터’가 인간의 언어로 보고할 단상과, 중앙엔 그가 이야기를 좀 더 잘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윗부분은 원숭이가 좋아할만한 그네가 있고 바로 아래에는 3면이 쇠창살로 이루어진 성인이 쪼그려 앉으면 꽉 끼는 공간의 우리가 같이 붙어있는 3, 4미터의, 놀이터 정글짐 같은 철제소품이 있었고, 바로 오른쪽에는 딱 성인 한명이 원숭이 특유의 자세로 앉아 있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정육면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고 몇 분후, 칙칙한 불빛은 잠시 꺼졌다가 곧이어 켜졌고 무대 왼쪽에서 검은 턱시도를 입은 인간화된 원숭이 피터의 모습이 드러났다. 연극이 시작되었다. 피터를 보고 그때부터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피터는 인간의 눈치를 보는듯한 제스처를 취하고는 무대 중앙에 서서 말없이 인사를 했다. 그리고 천천히 단상 앞으로 가서 앉아있는 관객들을 잠시 뚫어져라 훑어보고는...
“고매하신 학술원 회원 여러분.”(연극이 시작되고 나의 감정이 너무 요동쳐서 그런지 실제 대사는 까먹었다. 내가 본 책의 번역을 기술했다.) 첫 대사를 읊었다. 원숭이 특유의 끽끽 대는 울음소리와 인간의 언어를 오가며 피터는 온몸으로 고백을 시작했다.
연극의 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그대로인 것 같았다. 중간마다 효과음과 피터가 녹음한 이야기, 짧은 배경음악이 더해졌고 그로 인해 나의 요동치는 감정은 더욱 두근거렸다. 연극을 보는 내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연극은 인터넷에서 소개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노드라마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연극은 강렬했다. 딱 한 번 연극을 접한 애송이지만, 나의 오만함에 용서를 구하고 감히 예술장르끼리 비교를 해보자면, 연극은 실제 나의 눈으로 극의 인물들이 보여 지는 것이기 때문에 유리창으로 관조하는 형식의 영화보다는 감정이 훨씬 더 잘 일어나는 것 같았다. 둥! 둥! 음악에서의 북과 징소리처럼 얼어붙은 심장을 일깨우는 것처럼 말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은 단지 개별 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수준에 달려있는 것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가의 상태에 달려있는 것이지 연극 영화 일반으로 보아선 안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의 설명하기 힘든 감정, 아니 씁쓸하고 불쾌하고 수치스럽고 공포스럽고 웃기기도한 감정의 카오스를 맛보았기 때문에 백진기 배우 아저씨의 피터 연기는 정말 끝내주는 연기였다고 평하고 싶다. 그리고 카프카의 매력에 한층 더 빠질 수 있게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연극을 보고 싶다.

어디서부터 인지는 까먹었으나 연극의 흐름을 잠시 멈추고 중간에 피터가 아닌 연기로 인해 땀범벅이 된 배우 아저씨의 레크리에이션 진행이 잠깐 있었다. 그런데 이게 피터의 의도적인 애드리브인지 진짜 배우아저씨 본모습의 진행인지 헷갈렸다. 레크리에이션 진행이 끝나고 다시 피터의 보고가 시작되었을 때 한 말이 기억난다. 정확하진 않지만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셨듯이”라는 대사였다. 이 문맥으로 봤을 땐 피터가 의도적으로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한 것에 가까운 것 같으나, 그래도 나는 배우 아저씨의 본모습으로 판단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 때의 레크리에이션 진행MC가 학생들을 무대로 끌어들이는 것처럼 똑같이 그리 진행되었다. 첫 희생양(?)은 내 바로 왼쪽에 앉은 한 부부의 남편이었다. 배우 아저씨는 연극말투가 사라진 목소리로 조곤조곤 주량이 어떻게 되는지, 노래방 18번은 뭔지 등 부부끼리는 싸워야한다는 부부철학도 내세우며 결국 부부의 남편을 무대 위로 먼저 올렸다. 그리고 노래를 시켰다. 그 남자는 ‘열정’이라는 곡을 불렀고 뒤에서 한 사람(음향조명을 컨트롤하시는 중년아저씨?)의 박수소리가 먼저 들리자 나는 따라서 박수를 쳤다. 노래가 끝나자 다음은 자연스레 아내 차례가 되었고, 그 여인도 무대 위 남편 옆에서 노래를 불렀다.
부부가 무대에서 내려가 자리에 앉았고, 역시 다음 타깃은 바로 옆의 나였다. 나에게는 부부에게 했던 질문과 다른 종류의 질문을 섞었다. 먼저, 하는 일은 뭐냐는 질문에 사실대로 나는 그냥 아르바이트를 한다 했고, 약간의 한심이 섞인 표정과 말투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그저 그것만 하느냐는 질문에는 확실하게 답을 하지 않고 그저 따로 준비하는 게 있다고만 얘기했다. 사실, 현재 나는 시인의 길을 걸어갈지 말지 갈팡질팡 고민하는 상태다. 그 이유를 말해보자면, 시인은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 느낀 것, 감정들을 자기만의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꽃같이 보기 좋은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기도 하지만 카프카처럼 자신이 처한 시대상황과 그로인해 길들여지고 상처 입은 내면들을 직시하고 청사진처럼 드러내는 만만하지 않은 작업도 한다. 그만큼 시인의 길은 힘들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두렵고 자꾸만 원숭이 피터처럼 현실에 안주하려는, 아니 안주해버린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비겁하게 가만히 죽치고 누워 고민만 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2년 전부터 일어나지는 못할망정 일어나려고 조금이라도 발버둥 친 작품들을 몇 편 토해내기도 했다. 그 작품들을 이번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한 상태이기도 하고, 아직 습작상태의 부족한 시력(詩歷)상태이기도 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글을 쓰거나 문학작품들을 보고 있다고 딱 확실하게 답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다음 질문은 역시 똑같이 주량은 어떻게 되는지, 힘들면 어떤 노래를 듣고 노래방 18번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 대답에 주량은 소주1병정도, 힘들면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아저씨는 지적이라고 칭찬해주었다. 그 칭찬으로 나의 철없는 허영이 일어 기분이 좋아졌고, 그 허영 때문에 찝찝하기도 했다. 그 다음에는 끝까지 나를 무대 위로 올려놓으려고 노래말고 춤은 어떠냐는 질문을 했고 나는 나도 모르게 긴장감을 눈빛으로 발산하며 싫은 의사를 수줍은 듯 단호하게 표했다.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다음 타깃으로 넘어갔다. 네 번째 마지막 타깃은 처음 4시에 내가 직원으로 착각한 개성적인 헤어스타일의 남자였다. 그 남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는 연극영화과 학생이었다. 그 남자도 똑같은 질문 세례를 받았고 결국 무대 위에 올려졌다. 그 청년은 노래대신 ‘빨간 피터의 고백’ 첫 대사를 요청받았고 그것을 따라했다. 배우 아저씨는 자신과 같은 계통의 창작 일을 하려는 그 남자에게 창작에 관한 질문을 했고 충고도 해주었다. 무대에서 그 남자의 어색한 연기에 눈을 감고 싶었지만 분위기상 끝까지 봐주고 박수도 쳐주었다. 사실 나는 레크리에이션을 진행 받는 동안 박수를 치기 싫었지만 뭔가 박수를 안 치면 남의 눈치를 받을 것 같은 나약한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박수를 쳐주는 제스쳐를 취했다. 나는 레크리에이션 진행이 정말 싫다.
그 청년이 무대에서 내려가고 드디어 레크리에이션이 끝났나 싶었는데, 갑자기 뒤에 있던 극단 가족 일원인 회색빛 머리칼의 중년아저씨가 소개되었고, 그 아저씨의 자랑인 소위 딴따라 퍼쿠션 연주가 시작되었다. 악기는 쉽게 옮길 수 있는 작은 1인용 테이블 위에, 주방에서 사용하는 스뎅 볼과 무슨 부처의 얼굴로 추정되는 희노애락의 표정이 각각 사면으로 조각된 금빛 상(像) 머리꼭지에 달려있는 심벌즈와 그 테이블이었던 것 같다. 퍼쿠션 연주는 젊은 사람이 듣기에는 좀 낡아서 듣기 거북한 각설이 딴따라였지만 스피커에서 울리는 음악에 맞게 잘 쳤다. 드럼채로 두들겼는데 박자감이 의외로 수준급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레크리에이션이 끝나자 다시 피터의 고백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막바지에 이르러 연극은 이내 막을 내렸다.
한편으로 나는 레크리에이션 진행을 연극의 일부분으로 여기기도 했다. 무대는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보여 지는 곳이다. 진실이나 거짓이 그대로 토로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무대위에 올려지는 것을 어려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거짓과 구더기가 들끓는 더러운 내면을 공개적으로 타인들에게 드러내고 보이는 것은 부끄럽고 힘든 일이니까. 다시 말해 연극인듯 아닌 듯, 피터가(혹은 배우가)인간처럼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하며 자신과 동급인 인간(관객)의 허영을 끌어들이도록 한 것일 수도 있다. 즉, 피터의 심정을 대신해서 말해보자면 ‘나를 동정하고 연민하지 말라. 내 모습이 관객들 너희의 모습이고 너희 모습이 내 모습이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레크리에이션을 통해 무대와 객석으로 구분되어진 것이 아닌 객석마저 무대의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작가들이나 위대한 예술가들이 자신의(혹은 타인들의) 비겁함과 더러운 내면들을 드러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드러내야지만, 비록 없애지는 못할 망정 없앨 수 있는 희망이라도 주어지기 때문은 아닐까? 작열하는 태양빛에 세균들이 죽는 것처럼 말이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그릇됨을 인정하고 반성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허영을 내심 느껴버렸고, 허영을 부리려고까지 했다. 레크리에이션이 끝나고 나에게 했던 질문에 클래식 음악 보다는 차라리 시낭송이라고 답을 못한 것에 후회가 되기도 했다. 시낭송이라고 답했으면 내가 지은 시나 내가 좋아하는 시를 무대 위에서 낭송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반성은커녕 연극이 끝나고 극장을 빠져나와 다시 집으로 가기위해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도, 버스에 내려 집으로 걸어갈 때도, 집에 들어와서까지도 후회의 망상으로 가득한 허영은 없어지질 않았다.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허영은 멈출 줄을 모른다. 하지만 이 불쾌한 마음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로 인해 반성하도록 부추기기까지하니, 그만큼 연극이 좋다는 신호이리라.
카프카의 문학은 정말 읽기 힘들지만,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 역시 만만하지 않다. 처음 연극을 접하기 전에 카프카의 단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한마디 충고를 더하자면, 책이든 연극이든 보기 전에 각오는 하시라. 피터를 통해 자신의 남루한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 그리고 아주 무거운 마음가짐은 피할 것. 카프카의 이야기는 유머러스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