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장면들이 꽤 있었는데 대사 하나 없어도 먹먹한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나의 개인적 취향일까? 아님 정말 억색함일까?

우리의 가락과 장단을 외국인이 주제로 삼아 하는 것이 왜그리 어설픈지...
세계화되지 못한 나의 부족함이겠지...

Deluge: 물의 기억(Jeremy Neideck연출, 서울문화재단/램시어터, 제레미 나이덱, 박영희 등) - 2015년 4월24일, 남산예술센터

“우리가 많은 것을 잃는 꿈을 꾸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벗이여, 삶과 죽음이 우리 뒤에 있다( I dreamed we had lost much. I do not remember what we have lost. My friend, death and birth are behind us) Judith Wright (1915-2000) "

객석을 찾아가면 좌석 위에 이 글이 쓰인 작은 종이 한 장이 놓여있다. 호주 시인인 주디스 라이트가 쓴 홍수 (The flood) 중에 나오는 글이다. 이 종이로 종이배, 또는 종이학을 접으면, 배우들이 객석을 돌아다니며 유리병에 담아간다.

...남산예술센터의 무대는 제일 낮은 곳에 있고, 객석은 무대를 둘러싸고 방사선 방향으로 올라가며 놓여있다. 어두운 푸른 색 계열의 조명이 어슴푸레 비추는 무대는 바다 혹은 조난당해 떠 밀려온 고립된 섬의 이미지다. 무대 세트는 단순하다. 무대 바닥 여기저기에 종이학 이나 종이배가 들어있는 유리병과 컵, 신발, 책 등의 자잘한 일상 소품들이 놓여 있다. 난파당한 배, 갑자기 조난을 당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떠내려 온 유류품 이거나 혹은 유품이다. 무대 주위로는 여덟 개의 나무 기둥이 서 있고, 나무 기둥 위에는 속이 텅 빈 사각형 고리가 솟아있다. 멀리 떨어진 외부와 교신하기 위한 안테나의 느낌을 준다.

첫 장면은 담요를 덮어쓴 여성(박영희)가 오래오래 무대 안 쪽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8명의 남녀가 맨발로 나타나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놓인 유류품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만져보다가 하나씩 주워서, 무대 주위의 나무기둥 옆으로 천천히 옮겨 놓는다. 남녀 배우 모두 폭넓은 치마를 입고 있고, 맨발이다. 남자배우들은 상반신을 탈의한 채이다. 배우들은 다른 배우들과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각자 자기의 일을 하다가 때때로 다른 배우들과 마주 치면 멈칫하다가 다시 유류품을 나무기둥 주위로 옮겨 놓는 일을 계속한다. 하나하나의 동작마다 멈추고, 생각에 젖었다가, 다시 느릿느릿 움직인다.

무대 가운데 흩어져 있던 유류품들을 모두 나무기둥 옆으로 옮겨놓으면, 8명의 남녀는 자기 앞의 나무 기둥을 더듬으며 몸짓을 한다.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기둥을 더듬고, 천천히 돌면서 고통스러운 춤을 추던 움직이던 배우들은 이윽고 한 무리가 되어 자신들의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한 안간힘과 구원의 희망, 한없는 기다림 등을 발레와 컨템퍼러리 댄스, 우리나라의 굿거리, 무술 동작 등 다양한 동작과 몸짓, 춤으로 표현한다.

8명의 배우들이 모두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몽환적이지만, 슬프다. 깜깜한 무대 뒤편에서 어둡고 검푸른 조명을 비스듬히 내리 비추고, 짙은 스모그를 활용하여 망망한 바다를 표현하고, 마지막 안간힘으로 허우적대다가 물속으로 사라지는 배우들의 마지막 손짓은 가슴 저리게 막막하다.

연극의 마지막 부분은 영혼을 달래는 의식이다. 특히 바다에서 건져낸 삶의 흔적들을 온 몸에 말아 두른 채, 건져도, 건져도 딸려 나오는 광목천을 손에 쥐고, 구슬픈 구음과 힘겨운 몸짓으로 무대 곳곳을 걸어 다니는 제레미 나이덱은 한풀이를 하는 씻김굿의 영매를 닮았다. 갑작스런 재난으로 죽은 자들을 불러내어 삶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들어 주고, 살아남은 자들의 끝없이 계속될 무거운 아픔과 고통, 상실감을 위로한다.

이 작품은 연극, 현대무용, 피지컬씨어터, 굿판이나 설치미술 그 어떤 단어 하나로 설명하기 힘든 다원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14년 한국과 호주에서 공연된 “대홍수(Deluge)”을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대홍수”는 2011년 호주에서 발생한 대홍수와 그로 인해 생명을 잃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위로하기 위하여 호주의 램 시어터와 서울시의 창작공간인 문래예술공장의 협업으로 만들어졌으며, 2015년 4월의 “Deluge;물의 기억”은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기억하며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설명이나 대사 한마디 없이 몸짓과 춤, 구음과 낮은 소리, 어두운 조명만으로 우리가 잃어 버린 것에 대한 기억과 슬픔, 분노, 고통을 오롯이 전달하고, 느끼고, 직면하게 함으로써 치유의 공간을 제공하고, 상처와 기억을 어루만지며 위로한다.

4명의 호주배우와 4명의 한국배우는 자기 나라의 대형 재난사고와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전통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아픔과 기억을 몸짓으로 잘 보여준다. 특히 이 작품을 제작하고, 이끄는 제레미 나이덱의 살풀이 몸짓과 깊은 구음은 한(恨)의 정서를 그 어느 한국배우 보다도 더 생생히 전달한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이들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보내줄 수 있을까?''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이 무용극은, 2011년 2월 호주에서 발생한 대홍수와 그로 인해 실종된 사람들에 대한 아픔을 이야기하고자 만들어진 극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고 계신 것처럼 외국공연을 라이센스 형식으로 들여온 것도 아니고, 오롯이 세월호 사건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극도 아닙니다. 이 극을 위해 2011년부터 한국-호주 합동공연으로 예술가들이 서로 오가면서 끊임없이 교류했고, 그 결과물이 2014년에 만들어져서 각각 브리즈번과 서울에서 공연되었다고 해요. 그 후에 우리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고.. (당연하게도) 거기에 영향을 받아 상당 부분이 재창조되어 2015년 세월호 1주기 추모공연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 극은 하나의 어떤 일관된 스토리가 있다기보다는, 주제의식을 명확히 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요소들, 예를 들면 바다에 뒤엉켜 사라지는 사람들이라거나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모습들, 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어떻게 노력하는지 하는 것들을 장면장면의 이미지들로 표현했다 싶었습니다. 아마 제가 연극이나 뮤지컬에 비해 무용이 익숙하지 않아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어요.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장면장면은 꽤 있었지만,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전환될 때의 흐름 같은 부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 리뷰도 뇌리에 남는 장면들 위주로 써볼까 합니다.

장면1. 극이 시작하기 전부터 방송이나 어셔들을 통해 안내된 바에 따라, 많은 관객들이 종이배를 접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용수들은 병을 들고 다가와 관객들이 그 종이배를 병에다 담을 수 있게 도와줍니다. 종이배- 그렇게 모인 수많은 배들은 병에 담겨져 공연 내내 무용수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어떤 기억''이 됩니다. 첫 장면에서 이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데, 8명의 무용수들은 각각 하나의 커다란 기둥 같은 곳에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가져가기 시작해요. 종이배가 담긴 병, 그릇, 노트, 찻잔, 신발...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서로를 신경쓰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물건들을 자기 몫의 기둥 아래에다가 가져다둘 뿐입니다. 그 공허한 눈빛,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아, 이 사람들은 뒤에 남은 사람들이구나.. 사라진 사람들의 기억의 파편을 모으며 혼자 고통스러워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저 뒤에 남겨져서, 그저 혼자서, 그저 막막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무와도 얘기하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서 떠나간 사람의 신발을 쓰다듬으며, 노트의 글씨를 들여다보며, 종이배가 담긴 병을 어루만지며...

장면2. 아마도 <Deluge>에서 가장 신경쓴 부분이 여기가 아닐까 싶어요. 비스듬히 객석쪽으로 경사를 진 조명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하나둘 바다속으로 마치 동화처럼 혹은 마술처럼 사라져버리는 장면입니다. 위쪽에서 객석쪽으로 내리막지며 푸른 빛을 발하는 조명은 어쩐지 보름달이 떠 있는 밤의 바다처럼 느껴지고, 가만히 서 있다가 하나둘 홀연히 바다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스르륵 사라지는 무용사들은 우리가 넋놓고 잃은 그 수많은 목숨들처럼 느껴집니다. 굉장히 직접적인 장면으로 표현되었는데도, 고요한 침묵과 숨죽인 긴장과 어쩐지 기묘한 평온한 분위기 덕분에 불편하거나 과하다고 생각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 공연에서 하나만 고르라면 단연 이 장면이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만큼 담담하면서도 가슴 아픈 장면이었어요.

장면3. 이 부분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냥 제가 멋대로 ''위령제''라고 이름붙인 마지막 장면 전체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는 어쩐지 인간이 아닌 영(靈)적인 존재로 느껴지고, 바닥에서 온몸을 비틀면서 혹은 고통스럽게 발작하면서 그에게 자기가 끌어온 그물을 넘겨주는 무용수들의 모습은 마치 생존자들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을 찾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어쩌면 바다의 신일수도 있고, 파도일 수도 있고, 해류일 수도 있고, 혹은 저 위에 존재하신다는 어떤 분일 수도 있겠죠. 그가 끌어온, 그리고 건네받은 그물들에는 온갖 쓰레기들과 비닐봉지와 힘없이 너울대는 종이배밖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애쓰는 그의 모습에서 그리고 무용수들의 모습에서 어떤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애쓰고 발버둥치고 땀을 뻘뻘 흘리며 한걸음 한걸음 걸어나오는 모습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느껴져요.

저는 개인적으로 <Deluge>라는 극 자체가 ''씻김굿''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치유하려고 하는 목적이 뚜렷이 보이는 극이라기보다는, 같이 슬퍼해주고 같이 미안해하고 같이 울어주는 극이라는 점에서요. 무용수들의 몸짓과 소리와 표정에서, 급박하게 바뀌던 음악들에서, 어둠 속에서 비춰지던 조명들에서, 이 극은 내내 고통과 절망과 비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무용수들과 함께 정서에 푹 빠져들었다 그들과 함께 정화되는 느낌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제가 ''진짜'' 생존자가 아니라서 이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애끓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바다를 보고있는 사람들에게 <Deluge>가 어떻게 다가갈지는.. 전혀 모르겠어요.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무용수들이 표현하는 이 모든 고통이 가짜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어쩌면 제가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이나 같은 감동을 느낄 수도요. 어떻게 알겠어요? 그들은 아직도 끝나지 않는 비극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걸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잊혀져서는 안 되구요. 이 공연이 부디 거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먹먹하네요. 독특하기도 하고... 기억에 인상깊게 남을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