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아역으로 데뷔해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 영화 <사도> 등 다양한 작품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문근영과 2016년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에 빛나는 박정민. 87년생 동갑내기인 두 배우는 지금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으로 한 무대에 서고 있다. 인터뷰 자리에서 마주한 두 배우는 연극 무대에 서면 자신의 단점이 다 드러나는 것 같아 두렵다면서도 무대에 서는 순간순간이 소중하다고 고백했다. 서로에게 자극도 받고 의지도 하면서 어제보다 나은 무대를 보여주겠다는 그들에게서 연기에 대한 남다른 욕심과 각오가 느껴졌다.

Q. 원작의 맛을 유지하면서도 나름의 개성이 살아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인 것 같아요. 작품과 캐릭터를 분석하는 과정도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문근영(이하 문) : 원작을 많이 공부했어요. 원작의 맛을 살리자는 게 연출님의 의도였거든요. 가장 어려웠던 건 원작의 대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려내서 관객들에게 전달하냐의 고민이었어요. 문어체에다 아름다운 수사로 꾸며진 문장이 많다 보니 읽으면서 머리 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 대사도 있더라고요. 하지만 배우는 말로써 어떻게든 관객들의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려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연출님이 오기 전 프리단계부터 정민이랑 같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여러 번역본과 영문판을 펼쳐놓고 샅샅이 공부했어요. ‘아, 이 대사는 이런 의미인가봐’ 하면서 이해해가는 과정이었죠.
 
박정민(이하 박) : 문어체적인 문장들을 최대한 말처럼 해보자는 게 제 목표였어요. 아직 완벽한 건 아니지만 (문어체와 구어체의) 접점을 찾아내고 서로 동의하는 과정에 시간이 걸렸던 거 같아요. 지금도 매일매일 다듬어 나가는 중이죠.
 
Q. <로미오와 줄리엣>은 400년 동안 계속 공연되어 왔고 각양각색의 줄리엣이 있었잖아요. 문근영표 줄리엣은 어떤 매력이 있나요? 
문 : “줄리엣이라는 틀에 갇히지 말자.”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기존에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줄리엣 이미지에 갇히지 말자는 의미기도 하고요 그 이미지를 일부러 틀어버리려고도 하지 말자는 뜻도 있어요. 그래서 어떤 부분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줄리엣이 보일 수도 있는 거고 어딘가에서는 저 문근영이 보일 수도 있고요, 또 어느 부분에서는 기존의 줄리엣도 문근영도 아닌 또다른 모습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Q. 초연이라 배우들의 아이디어도 많이 반영됐을 것 같은데 직접 의견을 제안한 장면도 있나요?
박 : 1막 1장에 신부님, 벤볼리오, 로미오 셋이 나오는 장면이 있어요. 로미오가 로잘린과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아서 실의에 빠져 있다가 벤볼리오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죠. 원작에서는 별로 밝지 않은 부분이지만 저는 이 장면을 더 빠르고 가벼운 호흡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연출님께 말씀드렸어요. 로잘린에 대한 사랑과 줄리엣에 대한 사랑이 다르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었거든요. 로잘린과의 사랑이 가볍게 그려질수록 줄리엣에 대한 사랑이 돋보이게 되니까요.
 
Q. 두 분 다 연극이 오랜만이잖아요. 무대에 선 소감은 어떠셨어요?
박 : 늘 저는 연극을 하고 싶어해요. 매년 짧게든 길게든 한 편씩 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살다 보니 3년 만에 연극을 하게 됐네요. 그런데 이전에 학교에서나 대학로에서 연극 할 때의 느낌과는 좀 달라서 처음에 당황스러웠어요. 치기 어린 마음으로 무대에서 재밌게 놀았던 예전과 지금은 달라요. 제가 원래 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인데 공연을 하다가 관객들이 잘 못 따라오는 것 같다거나, 반응이 조금 안 좋다 싶으면 그 때부터 관객들 눈치 많이 보게 되더라고요. 그런 눈치가 이번 공연에서 가장 심해진 것 같아요. 제가 잘못해서 관객들이 지루해 할 때면 많이 무섭고 힘들어요. 그래서 무대에 서는 마음가짐이 무거워졌어요. 한편으론 이런 부담감을 좀 버려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문 : 저도 늘 연극을 하고 싶어했어요. 처음 연극무대에 섰을 때 배운 것도 많았고 즐거웠던 순간도 많았거든요. 그래서 연극이라는 건 저에게 무섭지만 멋진 일이에요. 배우로서 늘 자신 있게 서고 싶은 곳이 연극무대이기도 하고요.
 

Q. 매체 연기와 무대 연기는 다르잖아요. 어려운 점이 있다면요?
박 : 제 대사가 스스로 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면 ‘다시 갈게요!’를 너무 외치고 싶어요. 근데 연극에선 안되잖아요. 틀리든 말든 2시간 30분동안 엔지 없이 가야 하는 이 공간이 무서워요. 카메라는 배우들을 기다려줘요. 감정이 올 때까지 기다려주고 감정이 오기 전까지의 과정은 잘라내고 편집하죠. 하지만 관객들은 제가 감정이 차오를 때까지 안 기다려줘요. 제가 제 감정이 다 차오르길 기다리며 연기하면 관객들은 지루해 해요. 그걸 지난주 공연하면서 확 깨달았어요.
 
제가 느리다는 게 여기서 탄로가 나는 거에요. 저는 신부가 ‘로미오는 추방이다’라고 말하면 그 ‘추방’이라는 단어에 감정적 반응이 오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한 사람인데 관객들은 그걸 기다릴 수 없잖아요. 그래서 어제 시도했던 게 제 감정을 기다리지 않고 대사의 힘을 받아 빠르게 치고 나가봤어요. 그랬더니 러닝타임이 20분 단축됐고 관객들도 더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동안 제가 매체 연기에 많이 적응돼 있어서 저도 모르게 관객들이 저를 기다려주길 바라고 있었나봐요. 그게 무리한 기대라는 점을 이제 알았고 보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나가고 있습니다.   
 
문 : 전 무대에 서툴다는 게 온전히 다 드러나버렸죠.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씩 고쳐가고 배워가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무대에 선다는 게 겁나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이렇게나 많이 남았구나'란 생각이 들어서 기쁘기도 해요.

카메라는 제 감정에 따라서 효율적으로 바스트, 웨이스트, 풀샷을 알아서 잡아주지만 무대에서는 배우 혼자 온전히 편집해야 해요. 어떤 대사는 관객들에게 바스트샷처럼 느껴지게 전달해야 하고 어떤 대사는 풀샷처럼 여운이 느껴지게 표현해야 하죠. 제가 그런 편집하는 능력, 무대에서 필요한 기본적인 자질들이 부족한 것 같아요. 그치만 어떻게든 저는 이 공연이 끝날 때까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할 거고 최선을 다할 거예요.
 

Q. 원캐스트로 계속 함께 하다 보니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됐을 것 같아요. 상대의 연기에 대해 평가한다면요?
박 : 연기할 때 항상 부러웠던 게 근영이는 인물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출중해요. 저는 되게 배역과 감정에 접근하는 속도가 느려서 애를 먹는데 근영이는 집중력이 좋아서 연습 초반부터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고요. 저랑 다른 방식으로 연기에 접근하는 것 같아서 항상 부러워요.

문 : 저도 매일매일 정민이에게 자극 받으며 연습했어요. 정민이는 연기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배우에요. 자기는 느리다고 하는데 느린 게 아니라 작품에 대해 깊고 집요하게 고민해서 시간이 좀 더 걸리는 것 같아요.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해서 나오는 결과물은 깔끔하고 명확하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잘 못하니까 정민이를 볼 때마다 자극받고요. 좋은 동료를 만난 거죠. 연기가 더 나아질 수 있게 같이 고민도 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어서 좋아요.

박 : 상대배우랑 이렇게 얘기를 많이 나눈 적이 없었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작 줄거리 자체가 디테일한 개연성으로 진행되기보다는 빠른 속도로 큰 사건이 빵빵 터지는 전개잖아요. 그 사건들 사이의 행간을 저희 배우들이 메워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관객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해 같이 많이 얘기했어요.
 
Q. 서로의 인간적인 장점을 꼽아준다면요?
문 : 정민이는 되게 진중해요. 말이든 생각이든 가볍지 않아요. 재치랑 센스도 너무 좋아서 재밌고 유쾌하고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죠. 앞에서 얘기하려니까 민망한데 진국인 친구같아요. 자 네 차례야.(웃음)

박 : 저는 생각보다 포기도 잘 하고 뭔가 유리멘탈이에요.(웃음) 근영이는 다년간의 훈련을 통해 다져진 멘탈과 체력을 갖고 있어요. 사실 근영이랑 동갑이고 친구긴 하지만 또래 배우에게 제 약점을 털어놓고 보여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근영이가 잘하는 모습 보면 질투도 나고 나는 왜 이럴까 자책도 하는데 근영이가 되게 그릇이 큰 친구예요. 여자가 힘들어 하면 남자답게 “괜찮아 근영아”해야 하는데 반대로 항상 제가 “내가 너무 힘들다 근영아.”하면 근영이가 “괜찮아 정민아.”라고 해주거든요.(웃음) 심리적으로 의지가 많이 돼죠.
 

Q. 두 분 다 만29살 동갑내기잖아요. 이십대를 돌아봤을 때 후회되거나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나요?
박 : 제 20대는 연기가 하고 싶어서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시기예요. 그게 왜 그리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중간에 후회한 적이 몇 번 있어요. 내가 이러려고 연기했나… 어, 다음 말은 안하겠습니다. (웃음) 그런 순간마다 잘 버텨온 거 같아서 제 자신이 기특해요. 뭐 하나를 진득하게 하지 못하는 인간인데 그래도 계속 흥미를 느끼는 걸 보면 연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 지난 10년 동안 새해 목표가 늘 ‘몸짱되기’였는데 번번이 실패했네요. 제가 어깨가 좁아서 10년간 어깨 운동을 했는데 왜 안 넓어지는지 모르겠네요.
 
문 : 20대를 돌아보면 다 후회할 것 투성이에요. 그래서 더 후회 안하려고요. 20대 때는 순간순간마다 지나간 일들을 후회하며 살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왜 그랬나 싶어요. 그동안 후회하며 살았던 걸 후회합니다.(웃음) 사실 나이를 먹어가는 게 싫지 않아요. 좀 더 인생에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아서요.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좀 더 주체적인 사람이 되고 싶고 더 자신감 있게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런 마음들이 나이를 한살한살 먹어가면서 굳건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변화가 있는 제 모습이 너무 좋아요.
 
Q. 새해에도 <로미오와 줄리엣> 지방공연 일정으로 바쁘게 보내겠네요. 새해에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가요?
문 : 저는 또 연극 하고 싶을 것 같아요.

박 : 2016년을 되게 정신없이 살았어요. 슈퍼마리오 게임하는 것처럼 집중해서 벽돌 부수고 버섯 잡으면서 달려나가다가 너무 흥분해서 함정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어요. 목숨 하나를 잃고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지금 이 연극이 되게 의미가 있거든요. 정신없이 살아온 저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준 거죠. 이 연극을 잘 해내서 살아나고 나면 제가 정신을 제대로 차린 상태면 좋겠어요. 지금은 머리도 마음도 복잡하거든요. 이 공연이 끝나면 많이 울 것 같아요. 그러고 나면 또다시 나아갈 힘이 생기겠죠.  

글: 김대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mdae@interpark.com)
사진 : 샘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