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욱은 혼자 인터뷰 장소에 덤덤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중에 그가 이야기 하길, 그는 웬만한 건 혼자서 한단다. 악보를 고르러 서점을 가는 걸 좋아하고 해외 연주가 있으면 혼자 여행가방을 끌고 비행기를 탄다. “그게 편하고 좋다”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차분했다.

지난해 김선욱은 숨가쁜 연주 일정 보냈다. 2006년, 그가 18세의 나이에 리즈국제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을 한 게 가장 큰 계기가 됐다. 이 대회는 차이코프스키, 퀸 엘리자베스,쇼팽 콩쿠르 등과 함께 꼽히는 명성 높은 국제적인 대회. 국내에서는 1975년 정명훈이 공동 4위, 1984년 서주희가 2위, 1990년 백혜선이 5위를 차지한 바 있다. 리즈콩쿠르 이후 그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 받는 차세대 피아니스트로 떠올랐다.

이후의 김선욱의 행보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연주 연속. 지난해 런던 필하모닉, BBC 웨일스국립오케스트라, 중국 상하이필하모닉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등 국내외 협연이 잇달았고 국내에서만 20개 이상의 일정을 소화했다. 그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을 가르키며 “저기에서만 10번은 연주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코끝을 찡긋한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드나 보다.

“지금까지 허덕이면서 어느 정도 잘 해온 거 같아요. 작년에는 오늘 연주 끝나면 다른 프로그램의 다른 연주가 이어졌어요. 5일 후에 독주회, 10일 후에 협연 같은 스케줄이 이어진 거죠. 그러면서 새로운 레파토리를 많이 배웠고 많은 경험을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매년 하면 안 되요(웃음).”

특별함,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콩쿠르 우승 이후, 수많은 연주 무대를 통해 김선욱은 섬세하고 신중한 곡 해석력과 이를 뒷받침 하는 테크닉을 보여줬고, 클래식 애호가들의 신뢰와 사랑은 폭발적이었다. 그가 등장하는 협연과 독주는 금새 매진되기 일쑤였고 그만큼 그를 찾는 무대는 많아졌다.

그리고 얼마 전 낭보가 전해졌다. 김선욱이 세계적인 클래식 매니지먼트사인 아스코나스 홀트의 러브콜을 받아 소속 아티스트가 된 것이다.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사이먼 래틀,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소속된 곳으로 이 회사의 최연소 아티스트다. 모든 언론들은 순수 국내파 아티스트가 거둔 쾌거라고 흥분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덤덤하다.

“콩쿠르보다 훨씬 좋은 일이긴 한데, 이건 더 발전하기 위한 기본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보면 큰 감동이나 그런 건 없어요. 콩쿠르 같은 긴장감이나 스릴이 없어서 그랬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김선욱에게 피아니스트로서의 열정과 자신감은,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라고 자각하고 받아 들이는 것에서부터 생겨난다. 혹독한 연습과 빡빡한 일정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무대 위에서는 대범함과 여유로움이 넘치는 피아니스트로 태어나는 거다. 그렇다. 그는 평범하지 않았고, 예술가의 고집과 예민함, 명민함이 순간순간 스치듯 표출됐다.

“지금 저는 뭔가를 이룬 것도 없고 대단하지도 않아요. 하나하나 발전해 나갈 뿐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에게 되뇌였어요. ‘나는 평범하지 않아’라고… 그러면 모든 절차가 기본이 되는 거고 다 받아들이게 되죠.” 그러니 올해 2월 한국종합예술학교를 졸업한 김선욱에게 ‘남들이 입학하는 나이에 졸업을 한 사실’에 대해 물었을 때 “아주 어렸을 때부터 확고하게 생각했던 일이라 사실 별 감흥은 모르겠다”라는 대답은 그의 가장 솔직한 생각일 거다.
“보통은 대학을 진학해서 진로를 정하거나 찾아나가는데, 전 초등학교 때부터 생각이 하나였어요. 난 예원학교에 갈 거고, 한예종을 졸업할 거라는 거. 워낙 확신하고, 확실했으니까.”

그렇다면 각종 콩쿠르 우승은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 갈까. 특히 2006년 리즈콩쿠르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예상은 했었냐는 질문에 고개를 흔든다.
“그날 결선에 6명이 진출했지만 아무도 누가 몇위를 할 지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 거에요. 그날 다행이 좋은 점수를 받아서 기뻤어요. 그런데 전 ‘안 된다’라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어요. 내가 콩쿠르에서 우승을 안 한다면, 매니지먼트와 계약을 안 한다면, 이런 생각 안 해요. 그건 차선책을 둔다는 말이잖아요. 그런 생각은 왜 하는 지 모르겠어요.”
그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프로이트의 ‘가지 않는 책’에 나왔는데, 느리게 해서 정확하게 가는 것보다 빠르게 해서 실패하는 게 낫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런데 빠르게 해서 잘되는 거 만큼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전 항상 그걸 추구해요. 그래서 전혀 차선책은 안 둬요. 만약 내가 2등을 하면 어쩌지, 3등을 하면 어쩌지 이런 걱정은 안 하죠. 나중에 보면 자연스럽게 잘 돼 있었어요.”



‘걱정을 안하고 차선책은 생각 안 하는 건, 당신이 가진 천부적인 능력 덕이 크지 않나’라는 질문에 “그건 아닌 거 같다”라고 한다. “전 어려서부터 피아노가 좋았지만 남들보다 크게 뛰어난 능력이라고 생각 해본 적 없어요. 단지 좀 더 밝은 귀를 가졌고, 악보를 빨리 보긴 했죠. 그건 정말 감사할 일이에요.”

세 살 때 처음 피아노를 만난 이후, 그에게 이젠 음악과 피아노는 공기와도 같은 일상이다. 그래서 그는 행운아다. 김선욱은 정말도 피아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연습할 때 피곤하거나 지칠 때도 있지만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없다. 음악을 왜 하는 지 모르겠다라는 생각도 해본 적 없다. 하기 싫은 걸 하면 스트레스지만 하고 싶기 때문에 모든 걸 그대로 받아들인다. “힘들 때도 있지만 그런 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라고 담담하게 이야기 한다.

매년 1%씩 성장하고 싶은 피아니스트
최근에 본 영화가 뭐에요? 음악을 뺀 인간 김선욱이 궁금한 나머지 빈약한 질문을 던졌다. 어톤먼트와 추격자를 봤단다. “그런데 영화를 봐도 이야기보다 음악에 귀가 쏠리더라고요. 가끔씩 한심할 때가 있어요. 음악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다시 상기라도 하듯 슬쩍 웃는다.

그나마 영화는 가끔 보지만 TV나 연예인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대신 수집하는 건 집착에 가까울 정도란다. 운동을 해도 마찬가지. 축구를 한다면 가장 잘해야 직성이 풀린다. ‘축구 선수보다?’라고 묻자 “목표설정을 잘 해야 한다. 나와 축구 하는 사람들 중 제일 잘하는 게 목표”라며 웃는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대부분 음악과 연관이 있다. 한 아티스트에 빠지면 그 사람의 CD는 모조리 수집하고, 또 다른 아티스트에 빠지면 또 다시 반복이다.

“고집이 심하게 있는 편이에요. 남들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뭐든 집착을 하는데, 그건 수집에 관한 거에요. 혹은 인터넷에서 검색할 때 끝까지 검색을 한다던가. 연애 관계에 집착하는 건 아니고요(웃음).”

그러고 보니 꽃 피는 스무 살, 여자친구에 관심이 있을 법 하다. 그런데 이 청춘,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한다. 얼마 전 화이트데이, 발렌타인데이도 나중에 지나서야 알았다고.
“오히려 예원 중학교 때 여자 친구가 많이 있었어요. 예원 중학교가 한 반에 남자 다섯 명, 여자가 마흔 명이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자연스러운 교류가 많아서 그렇진 않아요. 소개팅 같은 건 해보지 않았고, 해보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연습하고 음악 이야기 하는 게 좋아요. 누가 보면 너무 꽉 막힌 거 아니냐고 할 테지만….할 줄 아는 게 그거밖에 없어요.”

그는 요즘 오디오에 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BMW라는 오디오 브랜드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좋은 건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고 있어요. 그걸 사느니 좋은 피아노를 사겠죠. 지금이요? 국산 피아노 갖고 있어요.”

취미 이야기를 하는 김선욱은 천재 피아니스트 보다는 옆집 학생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곧 다가오는 BBC필아모닉오케스트라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진지해진다. 올해 그는 3월 BBC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의 협연, 12월 금호 챔버뮤직소사이어티 연주를 남겨두고 있다. 해외 일정은 좀더 빡빡하다. 미국, 캐나다, 스위스, 프랑스, 영국, 아이슬랜드, 체코 등에서 연주를 할 예정. 그는“지난해 보다는 공부할 시간이 늘어서 더 좋은 연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선욱은 오는 7월부터 영국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매니지먼트가 영국에 있는 탓도 있지만, 그보다 음악가로서의 네트워크를 넓히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또한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해서'도 작용했단다.

"작년에는 많은 아티스트를 만났어요. 어렸을 때부터 우상이었던 백건우 선생님, 정명훈 선생님과도 만났고, 짧은 시간에 많은 질문을 했죠. 궁금한 게 워낙 많았으니까. 음악 말고도 사생활에 대해서도 많은 조언을 들었어요. 올해에는 더 많은 음악가를 만나서 더 발전해야죠."

김선욱의 연주를 소장하고 싶어하는 관객들을 위한 음반 발매 계획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철저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음반을 내지 않을 것”이라며 “아마 5년 이내에는 나올지 않을까 한다”고 조심스레 예측한다.

김선욱은 스무 살이고, 계속 성장하고 있다. 스스로에게 혹독한 자를 대지만, 그걸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은 생각보다 크지 않아 보인다.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고 하자 “연예인한테나 어울리는 질문”이라며 곤란해 한다.

“저는 관객들에게 ‘어떤 기대를 가져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내 스스로에게 욕심이 생길 뿐이에요. 매년 1%만 성장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요. 내가 100살까지 산다고 하면 언젠가는 100%가 되지 않겠어요? 음악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경험이 쌓이는 거니까. 내 스스로 발전하고 나아갔으면 하는 거지, 그걸 관객들이 알아주길 바라진 않아요. 꾸준히 연마 하는 거죠.” 
김선욱은 "아직 내 소리를 찾지 못했다. 오랜 시간 공부해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뒤, 연습을 위해 연습실로 향했다. 명민하고, 철저한 예술가의 모습이다. 피아니스트로서 10년 후, 20년 후의 모습도 기대되는 건 그 때문이다.
 


글 : 송지혜 기자(인터파크ENT song@interpark.com)
사진 : 다큐멘터리 허브(club.cyworld.com/docuher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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