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눈에 띄었던 것은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었다. ‘커다란 남자의 손’이라는 설명은 맞지 않다. 긴 손가락 마디 끝에 가로 세로 길이가 비슷한 동그란 손톱이 간결히 자리한, 희고 강한 손가락. 수 천 만 번 이상 4개의 현(string) 위를 오르내렸음이 빚어낸 아름다운 자취가 반짝, 빛이 난다.

제1악장. Appassionato(아파시오나토, 열정적으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London Philharmonic Orchestra)와의 협연을 위해 내한한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은 인터뷰 약속일에 3월 들어 두 번째로 끔찍한 앓이(terrible sick)를 겪었다.
“얼마 전 LA에서 연주회를 앞두고 많이 아팠던 적이 있는데, 이번엔 먹은 음식이 좀 잘못된 것 같아요. 어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꼬박 하루를 끙끙 앓은 후에 나타난 그는 커다랗게 부은 눈을 깜빡이며 미뤄진 인터뷰에 대해 정중하고 자세히 ‘sorry’를 이야기한다.


링컨 센터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Ⅱ의 유일한 비올라 주자, 세종 솔로이스츠 수석 비올리스트이자 솔리스트, 2007-2008 남부 캘리포니아의 체임버 그룹 카메라타 파시피카(Camerata Pacifica)의 수석 비올리스트, 클래식 음악계의 젊은 거장들이 모인 앙상블 디토(DITTO) 비올리스트 등 그가 세계 속에 서는 이름들을 열거해 보노라면, 컨디션 난조가 하루 만에 그친 것이 신기할 정도다.
“가끔 힘들 때도 있지만, 아티스트는 대개 많은 타이틀과 그 안에서의 역할을 갖고 있어요. 훌륭한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서 테크닉과 무대 매너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음악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캐릭터와 색깔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리처드 용재 오닐이 선택한 곡은 영국 작곡가 월튼의 ‘비올라 협주곡’. 예리한 리듬과 다양하고 색채적인 화음, 화려한 테크닉 등이 특징인 곡으로 비올리스트들이 꼽는 가장 어려운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다양한 선곡은 청중들의 충만한 귀를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음악가로서 기량을 쌓는데도 좋다는 말을 듣고 나니 그의 선곡이 이해가 되지만 차분하고 슬픈 감성의 곡들을 선사하는 용재 오닐에 친숙한 국내 팬들에게는 조금 낯설 것도 같다.

“한국 청중분들이 알고 계신 것처럼 저는 슬프고 감각적인 음악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빠르고 강렬한 느낌의 곡들이 음악가에게 도움이 될 때가 있어요. 다양한 시대의 음악을 연주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월튼의 ‘비올라 협주곡’은 19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곡으로 로맨틱 하면서 구성적으로 매력이 넘치는 작품이라 연주하는 저의 감성을 표현하기에 아주 탁월한 곡입니다.”

‘비올라 협주곡’은 지휘자 금난새가 이끄는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2005년에 협연을 한 적이 있어 자신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영국적인 색채가 담뿍 묻어나는 까닭에 런던 필과 협연을 위한 최적의 선택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제2악장. Con sentimento(콘센티멘토, 감정을 갖고)

그가 연주하는 비올라는 낯선 악기였다. 오케스트라에 어울려 있는 이 악기를 바이올린과 정확히 구별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비올라는 바이올린이나 플룻처럼 두드러지거나 특별하게 여겨지는 악기는 아니에요. 그래서 혼자 무대에 설 때와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때 과정상 상당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협연에서 비올라는 아주 자연스럽게 오케스트라에 녹아 들어가야 하거든요.”

낯설지만 아주 친근한 이 악기처럼, 리처드 용재 오닐도 우리에게 낯설 법 하지만 아주 따뜻하게 다가왔다. 전쟁고아로 해외에 입양된 어머니를 둔 그의 사연이 TV 다큐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되었고, 그의 남다른 성장배경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할머니의 도움으로 음악을 배울 수 있었던 것, 세계적인 아티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소탈한 모습 등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움직였다.
“인간극장은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에요. 하지만 그 프로그램이 방송되기 전이나 그 이후에도 전 연주하는 사람이고 더 나아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미디어는 다양한 초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다 파악하기는 어렵죠. 좋게 봐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감사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저의 삶이 있고, 제 삶은 계속 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용재 오닐이 기뻤던 일은 클래식 음악을 접하기에 엄두조차 못 냈던 사람들이 공연장을 찾게 된 것.
“그 프로그램을 보고 음악회장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저마다 슬픔과 아픔이 있겠지만, 다만 제겐 그것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더욱이 한국의 관객들은 매우 감성이 풍부해요. 마치 록 콘서트장에서처럼 말이죠. 한 연주회에서 ‘섬집아기’ 연주를 마치고 보니 객석 앞줄에 앉으신 분이 막 울고 계셨는데 제 연주가 훌륭했다기 보다 음악이 가진 영향력을 느끼신 것 같아요. 저도 그 힘을 다시 깨닫게 되었고요.”
깊은 중저음의 음색을 가진 비올라의 선율과 감각적이고도 탁월한 그의 연주 테크닉은 2집앨범 <눈물>(Lachrymae)을 통해 많은 팬들의 감성을 적셨으며 3집 앨범 <Winter Journey>를 통해 깊이 있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제3악장. Animato(아니마토, 생기있게)

올해 서른 한 살 되셨죠?
“아…아마도요. 미국에서는 29살이에요!(웃음)”
 
함박 웃음이 가득한 얼굴. 음악가로서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며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실었던 그가 순간 ‘이모다 더 푸를 수 없는 청춘’을 보여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틈타 슬쩍 결혼 이야기를 던졌더니, 전보다 큰 박장대소가 나온다.
“인터뷰할 때 언제나 가장 많이, 늘 물어보시는 질문이에요(웃음). 왜 결혼 안 하느냐, 누구는 무슨 병 있는 게 아니냐고까지 하고(웃음). ‘섹스 엔 더 시티’의 영향일지, 이혼이나 동거의 영향일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질문 거의 안 해요. 또 30세 결혼은 빠른 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구요.”
‘소개팅’은 잘 되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을 것 같아 별로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사회가 해야한다고 부담 주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그다.

“저희 엄마도 한 10년 전 마흔의 나이에 지금의 남자친구인 빌을 만났죠. 실은 그때 빌이 엄마의 정신적인 상황이나 주변 여건을 이해해 줄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제 걱정부터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웃음).”
덧붙여 ‘매일 집에도 안 들어오고 피곤하다고만 하는 남편을 좋아할 사람이 있느냐’고 가벼운 볼멘소리를 하다가도 ‘그걸 이해해 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며 담담히 말을 잇는다. 이영애를 좋아하고 문근영을 두고 ‘배우로서 매우 재능있어 보인다’고 하며 ‘very very cute’를 말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한 달에 평균 한 두 번, 일년이면 스무 번 넘게 비행기를 타야 하는 그이기에 연애와 결혼과 같은 갑남을녀의 인생사가 더더욱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제4악장. marcato(마르카토, 힘을 주어 똑똑하게)

“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비올라 케이스를 열어 악기를 들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접했고, 15살 이후 집을 떠나 생활하며 연주했기 때문에 제 개인의 삶과 음악을 떨어뜨려 생각할 수가 없어요.”
어렸을 때는 법관이나 복지사가 되고도 싶었다는 그지만 이젠 음악이 오로지 ‘그 자신’이었다. 설사 사고로 악기 연주를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지휘자나 음악 교육 등을 하며 음악 곁에 있을 거라고 분명히 말한다.

줄리어드음악원을 장학생으로 졸업 한 후 다시 비올리스트로는 최초로 '아티스트 디플로마 프로그램' 입학, 2006년 미국 클래식의 최고 권위 상인 에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상 수상, 정명훈 이후 두 번째 한국계 연주자로 클래식 아티스트로서의 큰 영예라 할 수 있는 도이치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 레이블로 3집 앨범 발매 등 연주자로서의 탄탄한 커리어를 자랑함과 동시에 그는 지난해부터 UCLA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자리하고 있다.
“학생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느껴요.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독려해 줘야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아직은 새내기 기분이지만 전 계속해서 많은 경험을 쌓고 있고 이를 통해 좋은 스승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그가 이뤄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을 펼칠 일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에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일이다.
“TV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제 사생활은 많이 알고 계시지만, 음악적인 부분은 잘 모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음악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일종의 편안한 클래식 안내서 역할을 해 줄 수도 있겠네요.”
얼마 전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책 ‘공감’을 발간했다. 누구에게도 친숙한 곡 뿐만 아니라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곡들에 관한 이야기가 어우러진 이 책은 어려운 상황에서 음악을 접했던 자신의 인간적인 배경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클래식 애호가들을 키우고 싶다는 의지의 작은 실천이다.

 

 

제5악장. Ad libitum(애드리비튬, 자유롭게)

한창 ‘골드베르크’를 공부하고 있다는 그는 점점 나이가 들수록 바흐가 좋아진단다. 그 안에 열정과 기쁨 등 삶의 여러 요소들이 담긴 것 같고 곡의 하모니가 특히 와 닿는다는 용재 오닐. 심오한, 그러나 꿈꾸는 표정이 동시에 연출되는 그에게 음악은 무엇일까.
“음악은 세상이 제게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에요. 물론 삶이나 건강, 사랑, 가족, 이 모든 것들이 축복이고 아름다움이지만 영원하진 않잖아요. 하지만 음악은 제가 기쁘거나 슬프거나 어떤 상황에서든 늘 함께했고 변하지 않죠. 제게서 비올라를 빼앗아 간다고 해도 전 음악의 세계를 떠날 수는 없을 겁니다.”
‘기타 등등’이나 ‘그 밖에’가 없이 또렷하고 투명하게 음악만이 하나인 사람, 용재 오닐. 그가 세상과 만드는 콘체르토의 악보는 이렇게 오늘도 한 페이지를 더한다.

“그런데 현시대의 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궁금했어요. 이 세상에는 정말 프로파간다가 너무 많아요. 전 그렇게 허울좋은 말로 꾸며내는 것들이 정말 싫거든요. 지금 세계 경제와 미국 대선은….”
매일 질문만 받는 그 일 것 같아 선심 쓰듯 질문할 기회를 주노라 했더니 ‘인터뷰라 해도 편안히 주고 받는 이야기를 즐긴다’며 예상치 못한 말들을 쏟아 낸다. 오, 맙소사. 이 젊은 거장을 어찌해야 할꼬.



글 : 황선아 기자(인터파크ENT suna1@interpark.com)
사진 : 다큐멘터리 허브(club.cyworld.com/docuher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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