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대화는 적어도 기자의 선입견을 깨는 과정이었다. 첫 질문부터 "왜 이렇게 열심히 연극에 서고 있는가"였으니, 비뚤어져도 한참은 엇나간 기자 아닌가, 싶기도 했을 거다. '작은 얼굴에 긴 다리'로 스스로의 신체 비율을 팔등신으로 만들고 있는 박성훈은 처음에는 말끔한 외모로 관객들의 시선을, 그 다음엔 절절한 절규로 객석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게 사실이니 여러모로 무대와 그의 관계가 궁금했던 터.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에 없던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이제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무대에 설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만약 대학로에 다시 돌아와서도 무대에 서지 못했다면 정말 이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무대는 그에게 좌절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준 곳이라는 것이 더욱 적절할 듯하다. 대학 진학 후 워크숍 작품이었던 <택시 드리벌>의 덕배가 되고 나서야 "내가 몰랐던 세계가 펼쳐지는 경험"으로 연극의 매력에 빠지게 된 그는, 군 제대 후 더욱 배우고 익히고 싶어 극단 생활을 이어갔지만 포지션은 줄곧 '목수', 무대에 설 기회는 좀처럼 얻지 못했다.


"항상 무대 만들고 연습실 바닥 깔고. 재미는 있었는데 열 달 동안 받은 돈이 5만원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설 기회가 자주 있었더라면 버틸 수 있었을 것 같았지만 그렇진 않았거든요. 들어간 소속사도 탄탄하지 못해서 마냥 기다리는 시간만 길어졌었고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할 20대 중후반의 2년 동안 "이러다 영영 연기를 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던 박성훈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자신의 자존감을 추스려 세울 수 있는 곳이 대학로임을 직감했다.

"생각해보면 저는 연극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시 소속사 사장님께 대학로로 가서 연극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그때 저를 이해해주시고 다른 좋은 회사를 만날 때까지 제 일을 봐주시겠다고 해주셔서 참 감사했어요."

대학로로 들어온 그는 '극장 지붕' 아래서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다. MD도 팔고 안내 멘트도 했으며 그러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보게 된 <헤드윅> 등의 무대를 통해 다시 끓어오르는 피를 자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히스토리 보이즈>의 락우드가, <모범생들>의 서민영이, 그리고 <유도소년>의 민욱, <멜로드라마>의 재현이 되었다.

물론, 외모가 지금까지 맡아온 캐릭터를 한정시키는 단점은 있다고 스스로도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뭇 다른 느낌의 두 캐릭터, <유도소년>의 청소년 국가대표 복싱선수 민욱에는 중학교 3년 내내 짝사랑했지만 끝내 고백하지 못했던 사춘기 박성훈의 모습이, <멜로드라마>에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지만 불현듯 찾아온 사랑 앞에 저돌적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작가 박재현에는 무대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리던 또 다른 박성훈이 들어 있으니 배우 박성훈의 결을 하나로 단정짓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오)의식이 형 얼굴이 참 좋은 얼굴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잘생겨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맹구 같기도 하고. (웃음) 제 안에 있는 자그마한 부분을 확장시키고 또 발견해나가며 연기를 하는 것이겠죠. 굉장히 장난기도 많고 또 숨겨진 거칠고 난폭한 부분도 있을 거에요. 도전해 보고 싶은 역이 굉장히 많아요."

배역을 만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요즘 그는 '공감'을 더욱 많이 떠올린다고 한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닐까,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전에는 '왜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지?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라고 내 잣대로, 사회가 규정한 잣대로 많이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왜 그랬을까, 어떤 이유가 있다면 그럴 수 있겠지'하고 생각을 하려고 해요. 이해가 안 되는 역할을 맡는다면 어떻게 진실되게 표현할 수 있겠어요. 사람을 이해하는 그릇을 좀 더 넓혀야 넓고 깊은 배우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끝까지 버틴 자가 승자라고 했는가. 그는 '어떻게 버티는가'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말한다. 여전히 무대에 서는 게 제일 좋다는 그지만 '어떻게 배우의 길을 만들어 이어갈 것인가'에는 다양한 장르에 대한 도전도 빠지지 않는다. 이미 <쌍화점><전우치><쓰리데이즈> 등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그는 아직 배우라는 수식어를 자신의 이름 앞에 내세우지 않았다. "나중에 '저 사람은 진짜 배우야'라고 인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그때 "배우 박성훈입니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이 되면 정말 행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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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키부츠> 니콜라는 남자친구와 함께 새로운 도시에서 꿈을 향해 진취적으로 나아가고, 결국 그 꿈을 쟁취해 12센치미터 레드 하이힐을 신는 인물이다.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무대를 뒤흔드는 당찬 푸른 에너지는 이예은에게서 출발한다.

“화만 내는 캐릭터로 안 비춰지기 위해 연습하면서 정말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니콜라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고,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찰리와 나, 둘을 생각하는 건데 찰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충돌이 많이 일어났던 거라고 생각을 해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고 허영 많은 여자로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개인적인 욕심이었죠.”

지난 12월 초부터 2월 말까지 약 3개월의 공연 중 중반을 넘어선 지금, 익숙함이 배우들의 새로운 적이 되어 나타나기 좋은 때지만 그녀는 “세 명의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니 매일매일 그들이 주는 감정으로 인해 대사를 다르게 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발견 때문에 지금도 재밌다.”고 말한다.


하긴 그녀에게 3개월은 장기 공연 축에도 들지 못하는 게 사실. 대학 졸업반 시절, 앙상블로 프로무대 데뷔식을 치뤘던 <미스 사이공>부터 역시 앙상블로 참여한 <레미제라블>, 그리고 네사로즈 역을 맡았던 <위키드>까지 모두 약 1년의 장기공연을 펼쳤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작 <위키드>는 생애 첫 단독 배역이 주어진 작품이자 많은 이들에게 이예은의 이름을 알린 남다른 의미의 무대이다.

“오디션을 통과했다는 게 저에게 되게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그 전까진 기회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거든요. 될 줄 몰랐는데, 캐릭터에 지원하고 그 역할에 대해 공부하고 알아갈수록 네사로즈가 굉장히 매력적이고 또 저랑 닮은 점도 많더라고요. 그래서 오디션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제 인생에서 굉장히 드라마틱한 타이밍이었던 것 같아요.”

뮤지컬 배우는 중학생 때부터 꾸어 온 이예은의 ‘단 하나의 꿈’이었다. 춤, 노래, 연기 모두에 관심이 있던 그는 “어린 마음에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사생활이 없을 것 같은 거에요. (웃음) 그러던 와중에 뮤지컬을 봤고, ‘아! 내 욕심을 다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게 뮤지컬이구나’ 생각했죠.”

많은 다른 이들과 비슷한, 그래서 안정적인 길을 걷길 바라셨던 부모님의 반대로 예고 진학은 어그러졌지만, 이예은은 고등학교 밴드부 보컬을 맡아 대회에 나가고 공연도 펼치며 진지하게 자신의 꿈을 향해 묵묵히 걸어 나갔다. 포기하지 않는 자를 막아 설 방법은 아직 세상에 없지 않은가. 자신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을 깨지 않으려는 의지가 이예은에게서 느껴지는 밝고 경쾌한 에너지, 그 안의 담대함을 만든 가장 큰 요소임이 분명하다.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뮤지컬 노래는 다른 노래들과 다르게 온몸으로 노래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신체적인 쓰임도 그렇고 감정도 온몸으로 해야 전달이 되고 그 과정도 배우 스스로에게 치유의 과정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무대에 선 이후 내 안에 폭발하지 못하고 계속 쌓여있던 어떤 것들이 많이 해소되고 치유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자체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거, 아닐까요? 그래서 뮤지컬 배우가 참 고맙고 행복한 직업인 것 같아요.”


<미스 사이공> 때 정말 큰 스승이 되어 노래와 많은 무대 경험에서 나오는 노하우들을 가르쳐준 김선영, <위키드> 때 같은 분장실을 쓰며 한결같은 모습, 따뜻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배우게 된 김영주 등을 떠올리며 이예은은 “애매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을 다잡고 있다.”고 말한다.

“요즘 끊임없이 무언가 내 안에 들어오고 그게 정리가 안되면서 흔들리는 나를 발견하고 있어요. 경력이나 제 나이나 뭔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하지만 흔들리지 않기 위한 첫 번째 요소, 체력을 위해 운동도 꾸준히 하고 요즘엔 책에서 받는 감성이 굉장히 커서 독서를 더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에너지를 크게 쓸 수 있는 강인한 역할이라도 그 안에 숨겨진 여린 모습들이 있잖아요, 그런 부분을 좀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단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스스로 일깨우고 있는 지금, 이예은의 가슴 속엔 <킹키부츠>의 대사이기도 한 ‘비 유어셀프’(Be yourself)가 굳건히 새겨 있다. 과거 한 차례 다녀왔던 적이 있는 인도로 다시 한번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그녀는 이번엔 인도인의 삶에 한 발짝 더 다가가 볼 수 있기를 바란단다. 삶을 있는 그대로, 더욱 진지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태도. 배우 이예은을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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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짝 박치인데 <원스>를 하면서 박자 감각이 굉장히 좋아졌어요. 음악에 관해 아주 많이 배우게 된 작품이죠. 배우들이 서로의 눈을 맞추며 연주해야만 음악이 흐트러지지 않으니까, 그런 점에서 무대 위에서 하나가 된다는 느낌을 계속 받고 가고 있다는 게 참 좋아요.”

<원스>의 안드레이는 체코에서 아일랜드로 이민 온 노동자다. 지금은 비록 패스트푸드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곧 매니저가 될 거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자신이 가진 꿈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 정욱진과 꼭 닮았다.

“저 역시 항상 큰 꿈을 갖고 살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그 꿈이 허황될 정도로 커야 오늘의 내 행동이나 연습량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을 하고요. 큰 꿈도 있고 작은 꿈도 있고, 그런 것들이 생각대로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지만요. (웃음)”


사실 정욱진은 <원스> 오디션에 다른 배역으로 지원했었다. 하지만 그가 지닌 착하고 순박한 이미지가 안드레이와 더욱 어울린다는 생각은 해외 스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스스로 ‘시골사람’이라고 수도 없이 말하며 빙그레 웃는 모습은 분명 다른 요즘의 배우들에게서는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정욱진만의 오묘한 매력이다.

“ '삼시세끼'에 나오는 그런 시골은 아니지만, 그런 시골의 모습도 자주 봤고, 여수가 삼면이 바다인데 집에서 10분만 차를 타고 가면 바다를 볼 수 있었어요. 보통 시골에서 서울로 연기를 배우러 올라오면 되게 무시를 많이 당하거든요. 사투리를 콤플렉스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고쳐야 한다고 하고요. 저 역시 입시학원에 갔을 때 많이 무시당했어요. 그런데 왜 그게 콤플렉스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서울말을 배우긴 하겠지만, 사투리도 나의 장기로 가지고 밀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정욱진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꿈의 이름을 써내려 갔다. 소풍이나 수련회 장기자랑에서 1등을 휩쓸고 선생님들의 성대모사를 기막히게 해 학교 명물이 되는 등 ‘정말 화려했던’ 학창시절을 보내며 개그맨이 되고자 했던 그가 배우로 꿈을 바꾼 것 역시 빠른 ‘자기 파악’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학교(서울예대 연기과) 입학 후 오리엔테이션을 가서 장기자랑을 했는데 아주 웃긴 거 했거든요. 반응은 제일 좋았는데(웃음) 난생 처음으로 3등을 한 거에요. 1, 2등은 ‘지금 이순간’ 그런 멋있는 노래를 한 아주 멋지고 예쁜 애들이 됐죠. 그러고 나서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 했어요.”

그렇게 개그 동아리 대신 들어간 창작극 동아리에서 배우의 꿈을 키워 올해로 데뷔 5년 차. <완득이> <쓰릴 미> 등 출연작을 하나씩 더해가면서 점점 더 무대가 가진 가치를 온몸으로 깨닫고 있는 중이다.
“저 역시 관련 학과에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제값 주고 잘 안 봤던 것 같아요. 비싸다는 인식이 있었고 그 값만큼 만족할 수 있을까, 싶었던 거죠. 그런데 점점 정말 공연을 본다는 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느껴요. 몸이 아픈 것만큼 마음이 아프면 괴로운데 그럴 때, 물론 10만원이 큰 돈이지만 그 돈으로 아픈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한번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빠져나올 수 없는 매력이 충분히 있는 곳이 바로 무대 예술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학교 선배이기도 한 신하균, 정재영 등과 같은 배우들을 보며 갖게 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 저변에는 단순히 유명해지고 싶은 것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무대를 찾을 수 있도록’ 유명해지고 싶다는 전제가 뒷받침되고 있다.

“원래 디스크가 있었는데 <번지점프를 하다> 연습 도중 허리를 크게 다쳐서 결국 작품에도 출연 못하고 병원에 한 달 동안 입원도 했거든요. 1년 동안 정말 엄청 울었어요. 그러면 보통은 현실적인 꿈을 꾸게 되잖아요. 그런데 한번 넘어져 보니까, 다시 일어나서 또 꿈을 꾸면 되지, 그렇게 되더라고요. 일어나기만 한다면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어요. 지금의 꿈은 죽을 때까지 무대를 중심으로 배우 생활을 하고 싶다는 거에요. 무대는 힘이 들지만 굉장히 규칙적이라 개인의 생활도 건강하게 지킬 수 있잖아요.”

“마음 속 악은 저절로 커지지만 선은 계속 개발해야만 커지기에 평생 착해지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이야기에 제법 오랜 시간을 할애했던 그. 얼마 전 예매를 해서 부모님과 함께 다녀온 조영남 콘서트에서 조영남이 무대 뒤에서 등장할 때 환호하던 할머니들 속에서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함께 “멋있다”를 외쳤다는 정욱진. "구수한 시골 정서가 스스로의 무기라고 생각한다."는 스물 일곱 살의 그가 남과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게 많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