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트 지붕이 서로 몸을 부대끼는 서울의 달동네. 어둠이 내려앉은 그 동네엔 구멍가게부터 아스라한 불빛들이 일어난다. 가로등이 미처 빛을 내주지 못한 삐뚤빼뚤하고 가파른 계단은 오르기가 쉽지 않다. 한 걸음, 두 걸음 집으로 가는 길은 멀기도 멀다.

“좁고 날 선 골목길, 중간서 만난 평상 같은 뮤지컬”

작품 내내 보이는 현실은 잔혹하다. 외국인 노동자 솔롱고는 등록기간이 지나 불법체류자로 전락했다. 공장에서도 쫓겨난다. 나영은 부당해고에 대해 따지러 갔다가 오히려 그만두란 소리를 듣는다. 고향 형제 때문에, 이번 달 방값 때문에, 그렇게 참고 참아왔던 청춘들은 더 높고 가파른 길을 오를 수 없어 지쳐간다.

뮤지컬 '빨래'는 한참 오르던 좁고 날 선 골목길, 중간서 만난 작은 평상 같다. 무대는 객석과의 벽을 흐트러뜨려 극장 전체를 무대로 사용한다. 멀쩡한 곳 없이 들쑤셔진 솔롱고와 나영에게 힘이 되는 것은 주인 할매의 ‘배려’와 희정 엄마의 ‘관심’이다. 그들은 시골집 비좁은 평상 안에 복작복작하게 부대껴 앉은 한 가족 같다. 서로에게 모진 말도 해야 하고, 아프고 다치는 모습도 지켜봐야 한다. 그래도 그들 사이에는 청국장처럼 끈적한 정이 엉겨 있다. 뮤지컬 ‘빨래’는 ‘주인 할매’와 ‘희정 엄마’처럼 비좁고 외로운 서울살이를 견디는 관객에게 작은 배려와 관심으로 쉴 곳을 내준다.

“소극장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

뮤지컬 '빨래'는 소극장 뮤지컬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았다. 극장으로 들어서면 아기자기한 무대 장치와 소품들에 의자를 당겨 앉게 된다. 무대의 배경에는 서울의 빌딩들을 표현한 미니어처들이 옹기종기 세워져 있고, 그 위로 검지만한 빨래 모형들이 깜찍하게 널려있다. 앞쪽에는 옥상의 한 켠이 놓여 있다. 나영과 솔롱고의 만남부터 사랑의 완결이 표현되는 곳이다.

뮤지컬 ‘빨래’는 무대를 관객석 통로까지 알뜰하게 썼다. 관객과 가깝게 만나고자 한 시도들도 부담스럽지 않고 적절하다. 꼼꼼하고 섬세하게 엮은 드라마 전개는 9차 프로덕션까지 쌓아온 내공이 보인다. 민찬홍 작곡가의 음악도 인상적이다. 대극장 뮤지컬의 웅장함은 아니지만 서민적이고도 대중적인 멜로디를 담았다. '비 오는 날이면', '아프고 아픈 이름', '슬플 땐 빨래를 해' 등은 극이 가진 감정의 높이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데 효과적이었다. ‘참 예뻐요’, ‘내 이름은 솔롱고’, ‘빨래’ 등의 넘버들은 친근하고 따뜻한 멜로디로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포용력 있게 표현해 냈다.

“배우들, 하나같이 속이 꽉 찼다”

배우들은 하나같이 속이 꽉꽉 찬 연기를 선보였다. 이보라는 당차지만 현실에 다친 '나영' 역을 잘 만들어냈다. 조금씩 솔롱고에게 빠져드는 모습도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뮤지컬 '빨래'에 참여한 적이 있는 '솔롱고' 역의 성두섭은 지난 시즌보다 한층 깊어진 디테일한 연기를 선보였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 관객의 이해를 돕는 연기 해석이 돋보였다.

이번 시즌은 지난해 참여했던 배우들이 대거 합류해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주인 할매' 역의 조민정은 감정의 높이와 길이를 조절하는 여유가 묻어나왔다. '마이클' 역의 최호중은 관객석의 반응을 조절하는 능숙함이 엿보였다. '빵' 역의 김지훈은 다채로운 연기로 극의 무게를 잡아주었다. 그 외에 이번 시즌 '빨래'에 새로 참여한 '희정 엄마' 역의 최가인과 '구씨' 역의 윤성원, '여직원' 역의 김여진도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냈다.

뉴스테이지 정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