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의 프레스콜이 있던 날, 어둠이 사라진 무대에서 세 명의 안나를 만났다. ‘안나’라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세 명의 여배우는 연령도 다양하고 분위기도 다르다. 언뜻 보면 같은 배역을 맡은 배우들인가 싶지만 유심히 지켜보면 밝고 건강한 분위기가 어딘가 닮았다. 세 명의 개성 있는 여배우들이 펼쳐내는 14살의 안나와 26살의 안나는 각각 어떤 모습일까. 아픔을 가진 캐릭터를 열정적으로 연기하고 있는 세 여배우와 함께 작품과 연습과정, 같은 안나를 맡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세 명의 안나를 한 자리에서 만나니 각각의 뚜렷한 개성들이 느껴지는데요. 같은 안나 역에 캐스팅된 배우들을 알게 됐을 때 어떤 느낌이셨나요?

송상은: 처음에 임강희 배우랑 같이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 했어요. 그 당시에 ‘김종욱찾기’ 연습도 보러 가고 그랬거든요. 그분이랑 같이 하는구나 했죠. 그런데 같은 배역인데 나이 차이가 좀 있어서 처음엔 왜 같이 캐스팅하셨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이 작품은 14살의 안나와 26살의 안나 연기를 같이 해야 하잖아요. 제가 강희 언니한테 26살 안나를 정말 많이 배웠어요. 그리고 14살의 안나도 너무 많이 배웠고요. 그래서 연출님의 의도가 이거였구나 싶었죠. 정운선 배우도 지금 함께 한지는 얼마 안됐지만 안나에 대해 말씀을 해주시는 부분들이 정말 도움이 많이 돼요. 얘기해주신 내용을 지금 무대하면서 바로 쓰고 있으니까요.(웃음)

임강희: 저도 상은이가 함께 더블캐스팅됐다고 했을 때 굉장히 좋았어요. 배우로서 상은이에 대해 좋은 얘기들을 많이 들었거든요. 제가 연기전공이 아니라 원래 성악전공이에요. 연기적인 면을 항상 고파하는 스타일인데 이 친구가 연기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김종욱찾기’ 이종석 연출님이 ‘스프링어웨이크닝’ 연출님인데 좋은 배우라고 하셔서 믿음이 갔어요. 저는 나이를 떠나서 제가 배울 점이 있는 배우들에게는 많은 것을 배우려고 노력해요. 상은이에게는 14살의 안나를 정말 많이 배웠죠. 저희끼리 농담으로 그런 적도 있어요. 네가 14살 안나를, 내가 26살 안나를 전문으로 해서 같이 나눠서 하면 어떨까.(웃음) 그리고 상은이는 무대감독을 시켜도 될 만큼 무대적인 부분을 잘 알아요. 그런 부분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정운선 배우는요. ‘내 마음의 풍금’하면서 진짜 제가 아끼게 된 동생이에요. 저희가 연습을 마친 후에 뒤늦게 들어왔잖아요. 새로 왔기 때문에 새롭게 보이는 부분들을 운선이가 잘 가르쳐줘요. 또, 운선이가 연기적으로도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저희 둘한테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정운선: 강희언니랑은 둘도 없이 잘 아는 사이에요. ‘내 마음의 풍금’은 제 첫 작품이었기 때문에 더 그렇고요. 상은이에 대해서는 저도 강희언니처럼 ‘스프링어웨이크닝’도 그렇고 칭찬을 많이 들었어요. 기대를 하고 연습실에 들어왔는데 굉장히 놀랬죠. 개인적으로 평소에 호감을 갖고 있었던 배우들인데 두 사람 다 안나와 너무 잘 어울리는 거예요. 저는 늦게 들어와서 더 부담이 되더라고요. 두 배우가 너무 완벽히 안나가 돼 있고, 게다가 잘 소화하고 있어서요. 하지만 보고 있으면 사랑스러웠어요. 부담을 많이 느끼는 동시에 감사하고 있어요. 이런 ‘건강한’ 배우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요. 사실 좋은 배우는 많은데 ‘건강하다’는 말에 어울리는 배우는 만나기 어렵거든요. 상은이나 강희 언니는 모두 ‘건강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배우들이고, 만나면 굉장히 기분 좋아지는 사람들이에요.

프레스콜 현장에서 세 분 다 처음 대본을 받고 시놉이 인상적이었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안나는 여성 캐릭터로서는 어쩌면 가장 강한 수위의 아픔을 겪는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인데요. 망설임이나 고민은 없으셨나요?

임강희: 아뇨, 오히려 없었어요. 저는 지금껏 지고지순한 역할을 많이 했기 때문에 깊은 내면 연기가 필요했거든요. 안나가 제게는 욕심나는 배역이었어요. 지금도 느끼지만 안나는 제게 정말 뜻깊은 역할이에요.

정운선: 저는 시작부터가 망설임이 있었죠.(웃음) 모든 작품이 어렵지만 창작 초연작이고, 인물 자체도 쉽지 않은 캐릭터고요. 연출님이 그래서 꼭 함께 해줘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결국엔 망설임보다는 쉽게 만나지 못하는 역할이라 끌림이 더 강했어요. 안나의 아픔은 조심스럽고 예민한 부분이잖아요. 표현해내는데 있어서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있어요.

상은 배우님은 어떠세요. 전작인 스프링어웨이크닝도 그렇고 안나도 강렬한 역할인데요.

송상은: 어쩌다 보니 제가 하드코어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요.(웃음) 주위에서도 조금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너무 어둡고 위험한 이미지로 가는 것 아니냐고요. 그래서 중간에 ‘넌센세이션’을 했어요. 완전 밝은 작품을 해서 물론 좋았지만 역시 저는 역시 이런 힘든 극이 좋은가 봐요.(웃음) 심장이 막 뛰고 극한 상황까지 가는 작품이 좋더라고요. 제가 굉장히 작품에서 빨리 빠져나오는 편이에요. 평상시에도 빠져있는 게 아니고 시작! 끝! 이런 식으로 명확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안나를 그나마 덜 힘들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작품의 인물들은 연기 면에서 연령폭도 넓고, 시공간도 초월하는데요. ‘안나’역은 특히 기억상실’이라는 현재 속에 과거의 깊은 아픔이 내재돼 있어요. 굉장히 연기하기 어려운 캐릭터라고 생각되는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송상은: 안나가 에너지를 폭발하는 신이 있어요. 저는 처음엔 그 부분이 가장 어려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가만히 있을 때가 더 어려운 거예요. 사실 안나가 대사가 많지는 않아요. 대부분 계속 무대에 나와 있기는 한데 보통 ‘헤르만’의 대사들이 주를 이뤄서 가만히 있을 때가 굉장히 많아요. 그 사이를 어떻게 메워야 할 지가 어려웠어요. 강희 언니와도 그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 순간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대사 없이 흘러가는 부분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눴죠.

임강희: 저는 나이에 대해 저 혼자 느끼는 벽이 굉장히 컸어요. 벽을 깨고 한 꺼풀만 벗으면 될 것 같은데도 스스로의 인식이 그랬어요. 연습실은 보시는 분들이 바로 앞에서 보고 조명도 없잖아요. 저 스스로가 약간 민망할 때가 있는 거예요. 제가 원래 가지고 있는 성격도 왈가닥 면이 많아서 어린 시절의 저대로 하면 되는데 약간 스스로의 벽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초반에 좀 헤맸어요.

어느 순간 그 벽을 깨고 나니까 어린 안나를 표현하는 데는 어렵지 않은데 대신 다른 어려움이 있었죠. 안나가 워낙 많은 것을 담아내야 하는 캐릭터다 보니까 미친 듯이 심장이 뛰어서 잠을 못 자겠는 거에요. 제가 작품 하고 잠을 못 이루는 일은 없었는데 아직 첫 공밖에 안 했는데 심장의 열이 식지 않아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잠을 못 자는데도 행복했어요. ‘블랙메리포핀스’는 제게 정말 처음 겪는 희한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에요. 안나도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느끼게 하는 캐릭터고요.

정운선: 안나는 깊은 상처가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얼마만큼 그것에 대해 깊이 있게 마음으로 헤아리고, 그 상처를 이해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림잡아 생각하는 추측이 아닌 아픔의 시간을 어떤 과정을 통해 겪었고, 14살의 시간과 26살의 시간이 있을 때 그 공백시간을 어떻게 살아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무대에서 안나로 살아낼 수 있을테니까요. 안나의 깊은 슬픔이든 아픔이든 지우고 싶은 기억이든 간에 드러내지 않더라도 잘 묻어날 수 있게 노력 중이에요. 극 자체가 가진 무게도 있고 안나는 어려운 연기인 것 같아요.

제가 연습실을 방문하기도 했는데요. 극은 어둡지만 연습 분위기는 밝더라고요. 배우분들 사이도 정말 좋으시고요. 에피소드 좀 들려주세요.

송상은: 저는 좀 개인적인 경험인데요. 안나가 막 쏟아내는 장면 있잖아요. 그 장면을 연습하는 날 아마 태어나서 제일 많이 운 것 같아요. 너무 많이 울어서 연습 끝나고 탈진했거든요. 물론 무대에서는 그때만큼 쏟지 않지만 실제 안나라면 그 정도로 울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날은 내가 한 번 실제 안나처럼 해 봐야지, 어느 정도 감정이 복받치는지 알기 위해서 해봤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간 2회 공연은 무리겠더라고요. 그래서 알았죠. 아낄 때는 아끼고 털어낼 때는 털어내야겠구나.(웃음) 그때가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아요.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임강희: 저는요. 함께 하는 배우들이 너무 귀여워요.(웃음) 저보다 어린 배우들이지만 정말 초등학생들 같아요. 저도 유치한 장난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다른 연습실에서 그런 장난치면 어색할 때도 있는데 여기서는 너무 잘 받아주고 저보다 더 심한 거예요.(웃음) 특히 대현 배우는요. 그냥 사람 자체가 정말 맑아요. 대현이만 보면 강아지처럼 머리를 막 이렇게 쓰다듬어 주고 싶어요. 대현 배우뿐만 아니라 다들 정말 처음 봤어요, 이렇게 순수한 배우들.(웃음)

정운선: 강희 언니가 말한 것처럼요. 세상에 이렇게 천진한 배우들이 있나 싶었어요.(웃음) 제가 그동안 어디서 빠지지 않게 천진한 역할이었는데요. 여기는 뭐 완전히 제 놀이터인 거예요. 강희 언니도 그런 면이 있어서 예전부터 잘 통했거든요. 이 작품은 배우들이 다 그러니까 완전 신이 났어요. 대부분 이렇게 어둡고 심각한 극을 하면 침울하거나 역할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너무 다들 열심히 하면서도 기분 좋게 작품에 대한 얘기를 하고 열정적으로 연습하고 하는 모습들이 좋더라고요. 연습과정이 지루하고 지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건강해요. 정말 이 배우들이 모여서 할 수 있는 게 축복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아, 그리고 물론 대현 배우도 천진하지만 정상윤 배우가 정말 최고에요! (일동 웃음)

송상은: 마지막 리허설 때 얼마나 웃겼는지 몰라요.(웃음)

정운선: 정상윤 배우는 이번 작품으로 처음 뵙는 건데요. 너무 웃기고 귀여우셔서 농담으로 제가 그랬어요. 조금 더 있으면 물어뜯을지도 모르겠다고요.(웃음) 분위기가 좋아요. 저희는 더블, 트리플끼리도 서로 참 잘 챙겨주고요. 이제 시작했는데 공연 끝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벌써 들어요.

임강희: 아, 정말 그래요... 첫공하고 난 후에 열이 식지 않는 걸 느끼면서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벌써부터 마지막이 오는 게 아쉽다고요. 그리고 연습실 분위기를 말씀드리자면요. 이번 작품에는 정말 ‘연습벌레들’이 모여 있어요.

송상은: 맞아. 독해요 독해, 특히 남자들이.(웃음)

임강희: 여자들은 발랄한 편이에요. 먹는 것도 좋아하고요. 그런데 남자들은 모이기만 하면 계속 대사를 주고받아요. 아주 연습중독자들이에요.

상은 배우님도 무대 전환을 다 외우고 계신다고 하던데?

송상은: 저보고 무대 돌리라면 다 돌릴 수 있어요. 물론 조명은 못 하지만요.(웃음)

(인터뷰②에서 계속)

박세은 기자_사진 이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