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풍월주’는 CJ크리에이티브 마인즈 리딩 공연으로 먼저 관객과 평단의 눈길을 끌었던 작품이다. 개막 전부터 관심이 집중됐던 이 작품에서 최유하는 여왕과 여자 사이에 선 진성 역을 맡아 열연 중이다.

최유하는 “모든 역할을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진성은 다가가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몸부터 목소리까지 “아예 모든 것을 만들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전작에서 그래 왔듯 그녀는 자신 스스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가질 수 없는 것이 나타났을 때의 자존심 상함”을 알고 있다는 그녀는 이번 역할에 대해 “진성을 어떻게 저라는 인간에 맞춰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포커스를 맞췄어요”라고 말했다. 최유하가 묻어나는 뮤지컬 ‘풍월주’ 속 진성여왕은 어떤 인물일까.

사랑받지 못한 여자, 진성에 대하여

- 뮤지컬 ‘풍월주’을 볼 때 진성은 연기하기 까다로운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왕과 여자 사이’에 놓인 애매한 인물이기도 하고요. 최유하 배우는 진성여왕을 어떻게 보셨어요?

저는 인생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아요. 그렇다고 막 비관주의자도 아니고요.(웃음) 저는 인생을 왕처럼 살았다고 생각하거든요. 결핍도 많지 않고요. 그래서 저에게는 ‘사랑받은 자의 비뚤어짐’이 있어요. 이기적인 거죠.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이 여자는 안 가져본 게 없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요. 근데, 진성에게 열은 가질 수 없는 사람이잖아요. 저는 가질 수 없는 것이 나타났을 때의 그 자존심 상함을 알고 있거든요. 처음에는 그 부분을 가장 많이 이해했어요.

제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은 ‘평생 그런 피부를 갖고 살아온 사람은 어떨까’였어요. 여자가 ‘뱀’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면 어떨까? 그건 제가 상상할 수 없는 범위더라고요. 그래서 이 역할이 어려운 것 같아요.

- 캐릭터를 이해하는 것부터가 굉장히 어려우셨나 봐요.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진성이 50살 정도 된 줄 알았어요. 연출님께 물어봤더니 ‘이 여자는 너보다도 어리다. 서른 살이다’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애를 못 가져요?’ 그랬더니, ‘그 당시 결혼 적령기가 17살이었으니, 10년 이상 아이를 못 가진 걸로 생각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처음에는 몸이나 목소리도 다 만들어서 연기하려고 했었어요. 그때 주변에서 ‘너는 너로부터 시작해야 돼’라는 말씀도 해주셨고, 연출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가 만들어서 연기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뮤지컬 ‘풍월주’팀 끼리 진성여왕에 대해 설정한 게 있어요. 실제로 진성여왕이 왕위를 내주고 6개월 뒤에 죽었다고 해요. 저희는 진성이 왕위를 내준 시점을 열이가 죽은 시점으로 하자고 했어요. 저는 사람이 됐든 물건이 됐든 정말 갖고 싶으면 먼저 부인을 하는 편이에요. 거기에 상처받을까 봐요. 그리고 그것에 대해 제 자존심을 지켰을 때 느끼는 환희가 있어요. ‘최유하, 자신을 잃지 않았다’고요. 하지만 그 뒤에 오는 후회를 알거든요. 저는 그런 후회 때문에 진성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이 여자는 끝까지 사랑이 아니라고 부인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풍월주’ 연습 때 연출님이 ‘너는 왜 열이를 사랑하는 티를 안 내?’ 라고 하셨어요. 그때 제가 ‘어떻게 내요? 내가 열이를 사랑하는지 나도 모르는데’라고 했었어요. 아직도 그런 충돌이 속에 있어요. 제가 열이를 사랑하더라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어요. 원래 저라는 사람이 그렇고, 피부병까지 있다면 저라면 지금의 한 백 배는 더했을 것 같아요.

- 진성이 열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에요.

저는 운루에 가서 사담과 열의 관계를 본 날 진성의 밤이 너무 상상이 가요. 한숨도 못 잤을 거예요. ‘여자의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둘이 그 장면에서 어떤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저 아이를 보는 눈이 왜 다르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거요. 전 그날 전까지만 해도 진성이 열이를 노리개로만 여겼다고 생각해요. 그 안에 사랑이 있을 수도 있지만요. 하지만 그날 이후로 진성이 바뀐 거죠. 왜 누구에게 끌리면 ‘내가 왜 이러지?’하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다음 날 아침부터 열이를 짜증 부리면서 찾는 거죠. ‘내가 왜 이럴까. 감정 들킨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지배하는 것 같아요.

그런 상태에서 진성이 아기를 가졌을　때 정말 행복한 거죠. 아기를 가진 것도 행복하고, 사람들 눈치 안 보고 열이를 궁에 들일 이유도 생겼고, 나를 설득할 수 있는 구실도 생겼고요. 그리고 당당하게 ‘너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네 애를 가져서야’라는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구실이 있다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 진성에 대한 첫 이미지는 어떠셨어요?

이 작품을 시작할 때 ‘왜 하필 기생이에요?’라고 물었어요. 대화하다가 모든 시대의 말기에는 성적으로 문란해진다는 말이 나왔죠. 제가 처음 떠올렸던 건 네로 황제였어요. 성적으로도 문란했고, 정치적으로도 어지러웠잖아요. 제 기억이나 느낌에는 네로 황제가 사랑받지 못한 사람으로 남아 있어서 진성도 그렇게 접근하려고 했어요. 여왕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사랑받지 못한 사람으로요.

운장과의 관계에서도 그래요. 진성이 모든 짜증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운장 단 한 명 뿐인 거죠. 제가 (김)대종 오빠랑 드라마 ‘여인 천하’ 흉내를 내면서 놀거든요. ‘네가, 감히!!’ 역정 내는 연기하고요.(웃음) 제가 작품 속에서 그렇게 연기한다고 해서 여왕이 되지도 않을 것이고, ’열아, 내가~‘한다고 해서(그녀는 실제로 애교 시범을 보여줬다)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비뚤어진 여자 같아요. 갖고 싶은데 못 가져서 의문인 여자.

저는 진성이 느끼는 감정이 시종일관 의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진성이 열에게 어떤 시도를 했는데 다 실패하는 거죠. 그게 늘 의문이고요. 마지막에 진성 여왕이 죽음으로 열이를 안잖아요. 그것밖에 길이 없다는 걸 아는 거죠. 진성이 이때를 기점으로 죽음을 맞이한 게 틀림없는 것 같아요. 이 여자는 그걸 지키려다 잃은 것이 너무 많거든요.

- 진성을 연기하시면서 가장 배우로서 ‘한 방’이 오는 장면이 있으세요?

저는 임신장면이 참 크게 와요. 극 중에서 제가 ‘무엇인가를 가지는 하나뿐인 장면’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다른 장면에서 집중이 안 되더라도 그 장면을 하면 정말 행복해져요. 맹인이 말하는 순간부터 심장이 뛰어요.(웃음)

- 진성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열과 사담은 어떤가요?

열이는 정말 착해요. (성)두섭이가 본성이 정말 착한 사람이고요. 발 닦여주는 장면에서 이유 없이 울 때가 있어요. 정말 착한 사람이 위로를 해주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열이는 진성이 피부병이 있든 말든 보듬어 줄 마음이 진심으로 있어요. 그걸 제가 느끼는 것 같아요. 열이는 사람을 만질 수 있는 참 착한 사람 같아요. 사담은….

- 표정이 약간 바뀌시는데요?(웃음)

열에게 집중하면 사담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어요.(웃음) 사담과 마주칠 때는 ‘내가 아니면, 네가 아니면’ 장면뿐인데요. ‘밉다’가 다인 것 같아요. 저번에는 연기하다가 정말 때리고 싶었어요. 약속되지 않았는데 때릴 수는 없잖아요.(웃음) 마냥 미운 것 같아요.열이와 마지막 만나는 장면에서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커요. 그때 열이를 보면 ‘이 아이가 그 아이를 정말 좋아했구나. 내가 정말 나빴구나’가 느껴지거든요.

-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연기하면서 전달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매일 확고했으면 좋겠어요. 연기하다 보면 오늘의 나는 이런 점을 좀 어필했구나, 오늘의 나는 다른 부분을 어필했구나 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날그날 원하는 부분을 어필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닌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삐삐 역할이면 개구지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잖아요. 이 캐릭터는 ‘내가 열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겠어’라던가, ‘내가 얼마나 가련한지 보여주겠어’라던가는 점이 크게 잘 서지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정말 즐겁기도 하고, 힘들기도 한 캐릭터 같아요.

정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