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무게로 짓누르거나 한 없이 가벼운 소극으로 떨어져버리는 것. 체홉의 희곡이 무대에 올랐을 때 둘 중 하나의 경우로 빠지지 않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상 속 주고 받는 말과 오고 가는 몇 발자국으로 소우주 인간의 깊은 심리와 관계를 논하며, 덧없는 웃음으로 또 상처를 잊고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사를 하나의 장르나 흐름으로 표현하기엔 부족한 게 당연하나, 체홉은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이런 균형을 이뤄가고 있기 때문이다.

레프 도진이 연출한 말리 극장의 <바냐 아저씨>는 체홉이 이뤄 놓은 균형을 무대 위에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때론 작품이 작가의 힘에 포장 되고, 또 작가가 작품 때문에 관객들과 멀어지곤 했던, 그리하여 체홉 작품은 어렵거나 이해가 안 되거나 고전 이상의 의미를 쉽게 깨닫지 못했던 수 많은 무대 경험은 기꺼이 잊자.

누이의 전 남편인 퇴임 교수가 미모의 젊은 새 아내와 함께 바냐가 살고 있는 시골로 내려오면서 혼란은 시작된다. 성실하게 일하며 지난 시간 존경으로 한 없이 우러러봤던 교수가 결코 그렇지 않은 사람임을, 그리고 교수의 두 번째 아내에게 응답 없는 사랑을 보낼 수 밖에 없는 현실 등이 바냐에겐 모두 고통이다.


<바냐 아저씨>는 제목에서 한 인물을 내세우고 있지만, 결코 누구의 시선으로 한 사람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학자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보냈던 찬란한 날들을 떠올리기에는, 저급한 시골 사람들 속에서 관절염에 시달리는 늙은이로 전락한 지금의 자신을 인정할 수 없는 교수, 그런 늙은 남편 곁에서 갑갑한 시골 생활에 지쳐가는 젊은 부인, 그리고 희망을 잃기 싫어 오랜 짝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는 소냐 등 저마다의 번뇌는 건조한 무대 위에서 어지러이 충돌한다.

문 밖 내리 쏟는 폭우, 멀어지는 마차 소리, 보드카 몇 잔으로 얼큰해진 일꾼이 연주하는 기타 선율 등 <바냐 아저씨>에는 입에서 나오지 않는 그 밖의 언어들이 극 속으로 관객을 몰아넣는다. 소리가 만들어 내는 잔상의 힘이 크다. 그 사이 가벼이 끼어드는 농담들이 자연스럽다. 웃음과 울음의 어울림이 이토록 자연스러운 체홉의 무대가 실로 감격스럽다. 우리 삶이란 이처럼 고민하고 또 웃고 아무렇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과거를 기억하고 후회하며 별반 나아질 것 없는 미래를 약속하는 것 아니겠는가.

섬세한 배우들의 앙상블은 기복을 몰랐다. 공연 내내 천정 위에 올려져 있던 커다란 짚단이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 위로 내려 앉으면, 안정을 찾아가는 바냐 아저씨와 이들의 모습이 비로소 완성된다. 수 많은 바냐 아저씨가 세상에 태어났지만, 이제서야 진짜 바냐 아저씨를 만났다고 고백하게 만드는 마침표이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LG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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