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 타!”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위풍당당한 자태로 비발디 오페라 <그리셀다> 중 ‘폭풍이 몰아치고’를 부른다. 두 발은 결심이라도 한 듯 무대바닥에 단단히 고정시킨 채 두 손으로 장중한 몸짓을, 안면근육을 모두 동원한 얼굴로는 참으로 다양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 사랑에 대한 불안과 격정을 목소리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보여주는데, 그 아우라에 쳐다보는 것도 조심스럽다.




메조소프라노의 마리아 칼라스로 불리는 바르톨리를 실제 무대에서 지켜봤으면 오죽 좋으랴만, 그건 아직은 꿈이고 스크린과 공연장의 음향으로 만났다. 언젠가 월간 <객석>에 바르톨리가 표지모델로 나온 적 있었다. 커버스토리를 읽으며 박장대소했던 기억, 1980년대 초반 로마 산타체칠리아음악원에서 소프라노 조수미와 동문수학했을 때 어느 날 바르톨리가 스쿠터를 몰고 오더니 뒤에 타란다. 10월의 커피콘서트 ‘유형종의 불멸의 목소리’의 첫 영상을 보며 내내 그 장면을 그려보며 실실 웃었다. 구도를 쉽게 잡을 수 있는 그림 한 편 완성. 남성스런 바르톨리와 뒤에 탄 여성스런 수미. “오빠, 달려!”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어께가 딱 벌어지고 몸집도 좋은 바르톨리. 그의 중성적인 매력과 파워에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나보다.




지금까지 메조소프라노보다 한 수 위가 소프라노, 소프라노 중에도 한층 기교적인 콜로라투라가 최고의 소프라노라 여겨왔다. 음악칼럼리스트 유형종의 설명과 “한 대 치면 굉장히 아플 것 같다”는 그의 장난스런 멘트로 다시 소개된 바르톨리를 듣노라면 메조는 음색으로 구분된 하나의 영역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올 시월의 커피콘서트는 실은 공연이 아니다. 요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 8명의 주요 공연과 해설을 듣는 강연이었다. 허나 전혀 실망스럽지 않다. 공연장의 음향과 대형 스크린으로, 그리고 감칠맛 도는 적절한 설명은 시간을 빨리 흐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매끄러운 진행과 깔끔한 어투로 잠깐의 지루함도 장내를 틈입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 만족스러웠던 점은 공연장을 나갈 때 머릿속이 묵직해졌다는 거다. 뭔가 하나 들고 나온 듯한, 알고 보니 그 물건은 쉽게 구할 수 없는 명품이었을 때의 배가 되는 넘치는 충족감.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는 가사가 그리 중요하지 않는 절대음악의 시기였으므로 노래 이외의 다른 표현을 아꼈지만(심지어 연기하다가도 노래를 부를 때면 꼿꼿이 서서 불렀지만) 요즘 성악가는 관객과의 호응을 꽤하기 위해 다양한 접근을 시도되고 있음을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다니엘레 데 니스의 영상을 통해 흥미롭게 바라봤다. 안나 네트렙코는 갈라 콘서트에서 플라멩코라도 추려는 듯 온 무대를 휘젓고 다니기도, 청중과 바이올리니스트의 애간장을 녹이기도 한다. 다닐엘레 데 니스는 오래전 여성 그룹 SES처럼 율동이라고 하기엔 좀 더 동적인, 댄스라고 하기엔 너무나 발랄한 무대를 선보였다. 그 율동 같은 댄스를, 댄스 같은 율동을 따라하고픈 충동이 일 정도로 신선했다. 떠올려봐라.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어울릴 법한 활동적인 바지를 입은 소프라노가 마돈나인 양 뇌쇄적인 포즈를 취한다는 게 오히려 귀엽게 보이는. 바지를 입은 소프라노 다니엘레 데 니스는 미국시민권자이지만 국적을 따지자면 스리랑카라고 한다. 스리랑카와 네덜란드 혼혈인 아빠와 스리랑카와 스코틀랜드 혼혈인 엄마가 스리랑카 내전을 피해 찾아든 호주 난민 수용소에서 만나 낳았단다. 그의 유럽과 아시아를 위태롭게 오가는 그의 독특한 외모가 한층 눈부셨던 순간이다.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가 취소되어 안타까웠는데, 알프레도와 비올레타의 이중창 ‘초대된 손님. 그대와 함께’를 감상할 수 있어 오래 기억할 수 있을 듯하다. 테너 롤란도 비야손과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그 사이에 놓인 커다란 시계와 그 시계에 눕혀진 비올레타의 붉은 윈피스도 인상적이다. 삶과 죽음과 그 사이를 오가는 위태로운 사랑.




오페라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화하고 있음을, 얼마든지 새롭게 연출될 수 있음을, 또한 앞으로도 오페라에 대한 청중의 사랑이 한결같을 것임을 짐작해 보는 시간이었다. 2006년에 시공사에서 출간한 <불멸의 목소리> 저자이자 음악 칼럼리스트로 활약하는 유형종의 정기적인 강연이 인천에도 기획되었으면 싶은 바람,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