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의법정''과 ''무림파혈전'', 그리고 보지 못한 ''괴물이 산다''에 이은 혜화동1번지 5기동인의 2013년 봄페스티벌 ''국가보안법'' 시리즈, 네번째 작품이다.
중간에 한 작품을 보지 못했지만, 아마 그것을 포함하더라도 이번 시리즈 중에서 가장 독특하면서도 보통 생각하는 연극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나 싶다. 아니 굳이 시리즈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본 작품들 중에서도 파격적인 형식이라는 점에서는 손에 꼽을 수 있다. 시리즈 첫 작품이었던 ''모의법정'' 역시 국가보안법의 실재를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어서 연극으로서의 모습은 많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마지막에 최후진술을 모두 대사로 소화한 부분을 제외하면 연극이라기보다는 학회에서의 학술발표를 보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이렇게 된 것은 이 작품이 국가보안법이 시대에 얼마나 뒤떨어진 악법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서 ''박정근 사건''을 은유하는 또다른 내용을 만드는 대신, 그의 최후진술을 위한 준비작업을 그대로 극 속에서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직접 쓴 최후진술문을 읽는 연습을 하면서 좀 더 늦은 형량을 받기 위하여 연기 지도를 받는 화면을 관객들이 보고 있을 때, 객석 곳곳에 앉은 배우들이 그의 말과 반대편에 앉은 연기지도자의 말을 따라 한다. 이런 방식을 통하여 보는 이들은 이 사건에서 박정근이 실제로 무슨 행동을 하였고 재판 과정 중 어떤 질문을 받았으며 그의 생각은 어떠한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니, 박정근 사건과 국가보안법에 대한 사실을 전달하는 역할로서는 충분한 셈이다.
물론 2시간 동안 그 화면을 보는 것이 이 작품의 전부는 아니다. 처음에는 거의 모든 배우들이 박정근의 말을 따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연기지도자의 말을 따르는 수가 늘어나고, 극의 마지막에 가서는 박정근의 말에는 오직 한 명의 배우만이 남게 된다. 이건 마치 ''그들이 처음 왔을 때''라는 시의 내용처럼 악법에 굴하여 한 명씩 떠나고 결국 혼자만 남는다는 점을 은유하는 듯 하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배우가 최후진술 전체를 절규하듯 결의에 차 낭독하는 장면은 국가보안법의 말도 되지 않는 적용에 걸린 사람들을 외면하는(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요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박정근 사건과 관련된 내용 외에, 제목에 걸맞게 ''빨갱이'' 또는 ''잠재적 빨갱이''의 갱생 작업에 대한 내용도 상당부분 들어가있다. 갱생 작업(마주치는 사람에게 미소 짓기, 빵과 우유 나눠주기, 담배 한갑 주기)의 결과와 사례를 발표하는데, 이 역시 배우들이 실제로 실행한 것들이기 때문에 학회 같은 느씸을 물씬 준다. 배우들 각자가 말하는 사례들이 나름 꽤 재미있기 때문에 이 연극에서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그런 갱생 활동이 각자에게 있어 국가보안법과 빨갱이라는측면에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어 단순한 ''소개''로 그쳤던 점은 아쉽다. 따라 말하는 배우들의 수가 바뀌기는 했지만 화면을 보는게 주가 되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라도 좀더 분석/해석이 들어갔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다보니 마지막의 최후진술을 제외하면, 역시나 학회 발표를 보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연극을 보러 간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운 점이다.

사실 국가보안법에 대하여, 그 법이 최근에 실제 적용된 사례에 대하여 이렇게 짧은 시간에 깊은 인상을 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체력이 뒷받침되어 초반부의 당황스러움을 졸지 않고 버텨낼 수 있다면 이 작품을 통하여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지에 대한 감상을 충분히 얻어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에 대한 ''연극 시리즈''로서는 과연 이 작품이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모르겠다. 다양한 형식이 존재할 수 있지만, 하나의 스토리도 갈등도 없는 연극은 너무 낯설었다.

* 기록...
출연 - 곽동현, 김효영, 박하늘, 이정호, 임정희, 전선우, 정대용, 정양아, 황미영. 연출 - 윤한솔, 제작 - 그린피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