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평.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으로 끌고 가는 정통 연기파 연극.
가볍지 않은 이야기인데다 날씨도 마침 비가 내려 분위기를 잡아주었는지 연극을 본 하루종일 기분이 묘했다. 좌석이 불편했으나 가까이에서 보는 배우들의 표정과 손짓들이 연기가 아닌 것처럼 사실적이어서 매 장면 집중하면서 희비를 함께했다. 비교적 가볍고 귀여운 장면들로 구성된 1막, 무겁고 비극적인 내용을 다루는 2막의 흐름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구성을 탄탄하게 했다. 특히 천사 장면은 뇌리에 깊게 여운이 남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날개 달린 천사가 아니라 인물들의 분신이 나와서 천사라고 소개하는 장면은 천사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들에게 천사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존재일지를 보여주는 예리한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이 연극의 가장 명장면으로 꼽을 수 있다. 작은 소극장에서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노어노문학을 전공했던 나에게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지만 러시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관객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연기를 잘 하는 배우들이 정말 많다. 다른 작품에서도 만나보고 싶다.

"집으로" (부제:Homeless 작:류드밀라 라주모프스까야 연출:김만재 출연:권지은, 장지수, 김예별, 오세영, 강승우, 이성재, 박예진, 강재현, 권삼중, 임도후 제작:십이월애, 아트하우스 름다 극장:대학로 연우소극장 별점:★★★☆☆) 작가 이름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아 찾아 보니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을 쓰셨던 분이다. 내용은 구소련 붕괴 직후의 레닌그라드를 배경으로 경제난으로 인해 고아가 되어 버린 아이들의 얘기이다. 어디서 본 듯한 내용인데 관람 이력에는 없다. 아무튼 분위기는 고리끼의 "밑바닥에서" 가 떠오른다. 무거운 내용이고 컨디션도 안 좋아 공연에 집증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어두운 조명 때문에 배우들 표정도 잘 안 보인다. 그러나,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집중력과 좋은 에너지를 보여 준 젊은 배우들에게 많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장지수, 오세영! 배우님 또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가혹한 환경이 인간을 얼마나 절망에 빠지게 하는지, 이상향을 꿈꾸면서도 희망을 거부하는 모순되고 무력한 행위로 표현한 작품. 간단한 소품들과 조명, 음향으로 어두침침한 지하실, 환상, 타오르는 불길, 허름한 아파트, 햇살이 비치는 순례길을 느낄 수 있던 것도 인상적. 배우들의 열연이 비극적 삶을 호소력있게 전달한다. 조금은 모자라지만 선량하고 순진한 아이의 마음을 품고 있음을, 순수함이 파멸로 변해가는 과정을, 천진하고 밝지만 변화하려는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들을 어두운 무대 속에서 명랑한 말투와 표정으로, 흔들거리는 몸짓과 손가락 하나하나의 움직임으로 묘사한다.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올곧은 삶을 이어가보려 안간힘을 쓰던 자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떠나고, 아름다울 수 있었던 자는 세상을 원망하지만 떠나지 못하고 변질되며, 어느 영화의 사자와 하이에나처럼 광기를 뿜으며 공포를 심는 자들조차도 두려움과 나약함을 보인다. 그 속에서 무력함을 느끼며 신을 부르짖는 간절한 눈빛은 관람이 끝나고도 깊은 여운을 선사하였다.

소련 붕괴 체제 이후 소외받은 사람들의 처절함과 고통을 잘 볼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은 러시아, 레닌100주년, 시민권(?)등 대화 내용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팜플렛 못읽었음) 개인적 삶의 모습을 통해서 역사적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개인을 통해서 사회를, 텍스트를 통해서 컨텍스트(맥락)을 파악하는 해석학적 이해과정이 재미있었다. 원제가 Homeless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homeless들이 집으로 가길 원하는 주제가 함축적으로 잘 표현된 거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Homeless는 소련체제 붕괴 이후 국가가 여러개로 흩어지고 고향을 떠나서 러시아로 오게된, 불안정한 인물들을 뜻하는 것 같다. 집으로라는 제목도 좋았다. 자신들의 고향인 조국, 혹은 진정으로 안식할 수 있는 삶의 터전, 마음의 집을 의미하는 듯하다. 예를들어 쟌나가 아파트에 살고있어도 그 곳은 진정한 집이 아니었다. 그들이 바라는 집은 영혼의 안식처이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도 떠올랐다. 그들은 신적인 존재에게라도 귀의하고 또 희망을 가졌는데 그 모습이 마치 현실을 잠시라도 잊고자, 내가 이렇게 살지만 언젠가 행복해질 수 있을거란 막연한 희망이라도 갖길 바랐던 것같아서 안타까웠다. 아편은 마취제의 역할도 하지만, 마약의 역할도 한다. 그들에게 종교란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게 해주고 행복한 미래라는 환상을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신에게 맹목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아편이다. 벤까가 기도해주기 위해서 이름을 물었을 때 자신의 본래 이름을 잊어서 굉장히 당황했던 시팔이는 결국 니콜라이라는 자신의 본래 이름을 기억해내고 기뻐했다. 수도사를 매달아놓고서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달라는 그의 모습이 짠했다. 그런 짓을 하면서도 그는 사실 타락한 삶에서 구원받길 바란것이었다. 벤까가 폭탄이의 이름을 묻자 세르게이라는 가짜 이름을 말하며 조롱했다. 폭탄이, 시팔이라는 이름도 있었지만 수도사 벤까는 그들의 본래 이름을 묻고 본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주고 싶어했다. 폭탄이, 시팔이라는 이름은 그러한 사회적 상황속에서 그들이 선택했던, 혹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후천적으로 형성된 실존적 성격의 인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러나 니콜라이와 같은 그들의 본래 이름은 그들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성을 상징하는 것 같다. 벤까는 악행을 저지르는 그들 속에 존재하는 본질적 인간을 위해 기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더 나아가 인류애, 휴머니즘인 것이다. 이는 예수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도 떠오르지만 마르크스의 휴머니즘도 떠올리게한다. 도마는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집에는 자기같은 고아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이것 또한 휴머니즘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휴머니즘에 기반한 공산주의 체제와 닮아있는듯하다. 공산주의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꿈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즉 소외받았던 인간들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하게 소외받지않고 사는 그런 삶. 쌍둥이가 옛날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그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과 그 주변인들을 공주와 왕자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뜻하는듯하다. 그들이 초라할지언정 인간은 모두가 공주나 왕자처럼 존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고, 쌍둥이가 꿈꿔오고 바라는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미래에는 부모님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움, 안락한 환경, 행복한 삶에 대한 소망이 담겨있다. 왕과 왕비는 나의 부모이자 의지할 수 있는 존재, 힘(권력)이 강한 존재를 상징한다. 그러한 존재는 자신을 지켜줄 수 있고 안정감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쌍둥이에게 부모님의 등장은 마치 히어로의 등장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형제는 벤까를 아빠라고 부르기도 했다. 왜냐하면 굶주린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종교를 통해 구원이라는 희망을 줬기 때문인듯하다. 쟌나는 사랑을 버리고 돈을 택했다. 그러나 돈많은남자와의 결혼도 좌절되고 아파트도 빼앗길 처지에 놓이게 된다. 마이끄를 쫓아냈지만 마이끄가 죽고서 결국 자살을 택한다. 삶의 수단과 목적을 착각하고 삶의 도구적 수단인 물질을 좇다보니 결국 삶의 본래적 목적을 잃은 것이다. 그녀는 비본래적 삶을 살았지만 본래적인 삶의 가치를 잃고서 자살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자살이 죄인 것을 알면서도 본래적삶의 가치를 상실하자 삶을 포기했다. 마이끄는 쟌나를 사랑했기때문에 그녀를 구하기위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폭탄이를 찾아간다. 하이데거는 죽음의 선취를 통해서만 현존재가 본래적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다. 현존재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언젠가 죽음이라는 존재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유한한 존재이다. 유한한 시간성 속에서 현존재는 그 유한함을 깨달아야한다. 즉 미래적으로 다가올 죽음을 깨닫고 불안을 통해 비본래적 삶에서 본래적 삶으로 전환해야한다. 마이끄의 죽음은 소포클레스의 작품 안티고네를 연상시킨다. 안티고네처럼 자신이 지켜야할 본래적 가치를 위해 죽는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실존을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이다. 딴까는 무엇이 죄인지도 모르고 죄를 저지른다. 그런 그녀가 정말 죄인일까? 예수는 간음한여자를 향해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에게 죄없는 자만 돌로 쳐라라고 했다. 그러자 아무도 던지지 못했다. 살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선택이 죄인줄도 몰랐던 딴까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딴까가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 때, 천사는 자신과 가고싶을 때 소리를 지르라고 했다. 그러자 바로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절망, 나를 당장 이 고통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요청이라고 느꼈다. 출산이, 죽음이, 그리고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것 같았다. 벤까가 폭탄이에게 아벨과 카인의 얘기를 들려준 뒤 네 형제는 어디있느냐고, 마이끄는 어디있느냐고 물었을 때 폭탄이는 아주 흥분하며 분개했다. 그것은 그에게도 인간적인 양심과 죄책감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양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어기제가 나타난 것이다. 그 또한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폭탄이도 시팔이도, 실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와 환경이 그들을 내몰았고 그들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잡아먹으며 생존해나갔다. 그들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실은 악한 인간이 되고싶었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사실은 자신의 악한 모습에 괴로워하는 사회의 피해자이기도 한 것이다. 사회구조의 붕괴와 혼란은 피해자를 낳고, 그 피해자들은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 악순환의 반복이 된다. 벤까는 모두를 불쌍히 여기며 기도한다. 그러나 그도 단지 인간일 뿐이다. 그 고통을 모두 대신 짊어질 순 없었다. 구원할 수도 없었다. 예수를 닮으려 노력해봤자 예수는 신이고 벤까는 인간이다. 기도해봤자 그는 이 모든 것의 근본적인 문제인 사회를 뒤바꿀 힘이라고는 전혀 없다. 결국 그가 짊어지고 데려갈 수 있는 몫이라고는 어린 도마 한 명 뿐이었다. 그 조차도 구원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도해봤자 신은 응답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빵이나 돈이나 껌을 주었을 때가 차라리 실질적인 구원에 가까웠다고 볼 수도 있다. 벤까는 그들에게 종교라는 아편을 제공함으로써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게 했지만 종교는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잠시 마취에 빠지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수도원이 이 세상이고 이 세상은 지옥이라는 말이 와닿았다. 그들에게 지옥이란 따로 없었다. 그들이 서있는 바로 그 곳이 지옥이었다.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자 선택한 방향은 다양하다. 종교, 매춘, 약탈, 폭력, 자살, 도피 등.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그곳이 지옥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 세계에 던져진 그들은 그러한 피투성을 저주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내던져지고 부모에게조차 버려진 그들은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죄를 짓지 않든, 죄를 짓든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을 괴물로 만든 것은 사회구조였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완전한 악역도, 선한 영웅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상처입은 사람들만 존재할 뿐이다. 마지막에 벤까는 요한계시록의 구절을 읽는다. 종말이 오고 새시대가 열린 뒤에는 옛 것은 아무데도 없었고 새 것만 있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공산주의 사회에는 변증법적인 역사가 있어야한다. 우선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어야 역설적으로 그 모순을 완전히 전복할 수 있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단결해서 아주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태까지 공산주의국가라고 칭해졌던 소련, 중국, 북한 등은 진정한 의미의 맑시즘적 공산주의라고 할 수 없다. 극중 인물들이 바라던 그런 세상은아름다운 유토피아다. 그것이 맑스의 공산주의와 닮아있긴하지만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그냥 그들이 바랐던 것은 원초적이고 소박한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엔 너무나 가혹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렇게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서 장황하게 이야기를 쓴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작품도 물론 좋았지만 이 작품이 내게 더 와닿았던 이유는 배우들의 전달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호소력있는 연기, 극중 인물들의 심리묘사, 대사에 내포되어있는 메세지, 연출을 통해 드러나는 메타포 등 내게 하나하나 전달되는 것이 느껴져서 좋았다. 내가 마치 그 안에서 그들과 감정을 공유하는 느낌이었다. 연기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직관적으로 느껴진 대로 말하자면 아주 좋은 연기였다고 말하고싶다. 이렇게 좋은 작품과 좋은 연기가 함께 어우러진 관람은 오랜만이었다.

아이들의 순수하면서도 비극적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유할 게 많아지는 작품이다. 아이들이 불행하다면 그곳은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닐 것이다. 폭탄이와 시팔이까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배우들의 얼굴 근육까지 떨리는 연기, 아주 놀랍다. 음악 역시 오래 기억에 남는다. 무거운 주제 때문인가 공연을 본 다음 날까지도 아른거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집으로. 좋은 작품을 하나 알게 되어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