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그녀의 얇고 하얀 두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관객은 거울이다. 공포스러울 만큼 똑같은 어미를 반복해서 내뱉고 있는 미래를 향한 주문 같은 말. (부적절한 단어가 포함되었다하여 인스타에 관람 후기 남기겠습니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김애란 작가의 <서른>이라는 작품의 한 문장이다.

연결되어 있는 듯하기도 개별의 이야기 인듯도한 연극 <이 아이> 속의 9가지 에피소드를 보며
나는 자꾸만 저 문장이 떠올랐다.

1장 속 임산부의 미래가
2장의 우울한 엄마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3장의 슬픈 아빠나 5장의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하지만 엄마로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
말하는 엄마일 것만 같단 생각이 자꾸 들어서였기 때문이리라.


충분한 사랑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을 아이가
과연 충분한 사랑을 주는 ‘좋은 엄마’가 될 순 있을까

마녀가 수정구슬을 만지며 주술을 걸 듯 부른 배를 매만지며,
잘 나오지도 않는 화장품을 겨우겨우 얼굴에 덧바르며,
1장 만삭의 임산부는 계속 어떠어떠한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하듯 말한다.

그러나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그가 되겠다고 한 엄마는 과연 좋은 엄마일까’ 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1장의 나는 뱃속에 아이가 있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아이’일 것이다.
극 중에 그의 부모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의 대사를 통해 어떤 부모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되진 말아야지 수없이 생각하며 자랐을 아이는
어른스럽고 자랑스러울 엄마의 모습보다는
엄마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아이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인다.

위태롭게 벼랑 끝에 몰린 약하고 어린 본인을 숨기려고 잔뜩 날을 세운 아이


그걸 배우님이 어찌나 잘 표현해내시는지 나는 극에 과하게 몰입하다 못해
어느새 그 아득한 과거나 내일의 일까지도 상상하고 염려하고야 말 정도였다.

상대 역의 배우도 없이 오로지 혼자 덩그러니 무대에 서지만
충분히 관객들을 몰입하게 하고 압도시키는 대단한 힘을 가진
그런 배우님이 바로 문재경 배우님이 아닐까.


그 진한 눈빛.
뿐만 아니라 온 몸의 세포 근육 하나하나 다 알뜰하게 써서 연기하시는 분이었다.

이젠 고개를 들고 어깰 움츠리지 않겠다 말하는 장면에선
어깨 뿐 아니라 목울대까지 잔뜩 힘주어가며 연기를 하시니
과연 재경배우님 보다 해당 배역을 더 잘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되뇌이는 대사가 마치
관객들에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만 같다고 느껴질 만큼
초연에서도 충분히 강렬한 힘이 있다고 느꼈었다.

이번 앵콜공연에서는 경쾌하고 발랄하다 못해 광기가 느껴지는 재경 배우님
의 목소리에 다른 의미로 대사가 더욱 섬��하게 와닿았다.


극 < 이 아이> 에는 관객들의 웃음을 노린 장면들이 많다.
겨우 10살인 자신의 아들에게 사랑해달라는 엄마
심각한 장면 중에 난데없이 등장하는 아기 돼지 동요와 율동이 그렇다.
재미있으라고 넣어놓은 그런 장면들이 슬프게 느껴져 오히려 쉽게 웃을 수 없었다.

토실토실 아기 돼지 젖달라고 꿀꿀꿀
엄마돼지 오냐오냐 알았다고 꿀꿀꿀

아기 돼지에게 오냐오냐 젖을 주고 비가 오니 밖에 나가 놀면 안된다며
다정하게 달랠 줄 아는 어쩌면 당연한 엄마의 모습인데
2장의 엄마에게는 그렇지가 않으니 말이다.


동요 가사처럼 행복하고 평범하면 좋겠지만 그와는 너무도 다르다.

난간에 위태롭게 서있다가도 겨우 자신을 다잡고 ‘심각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이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엄마가 그렇듯
엄마를 어르고 달래어보기도 하고 가방끈을 꾹 쥐거나 손등을 할퀴면서
엄마가 그럭저럭 좀 괜찮아지길 견디는 것이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서보찬 배우님은 어른도 아이도 아닌
충분히 아이답지 못한 아이를 정확히 짚어 연기한다.

5층 사는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겠다며 다짐한 것처럼
엄마 대신 매번 사과하고 고개 숙여야 하는 지나치게 아이답지 못한
윗층 집 아이에게도 조금만 더 너그러울 순 없을까 하는
연극 속 세계에 괜한 오지랖을 부려주고 싶어질 만큼 말이다.


집을 나서고 나서야 아이는 눈물을 보인다.
눈가를 훔치며 골목을 뛰어가는 아이를 표현하기 위해
골목 벽처럼 파티션을 사용했는데
이때 파티션을 들고 있는 이는 5층 집의 그 여자다.
그리고 5장에의 미혼모.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그 두 엄마가 울며 뛰어가는 아이의 뒤에 묵묵히 서있는 모습에
연극을 보던 내가 왜 위로를 받았는지 모를 일이다.

의도한 연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장면 전환까지도 섬세하게 짜여진
이 연극이 그래서 참 좋았다.



극을 여러 번 보다보니 숨겨놓은 듯한, 아니면 내가 놓쳤는지 모를 장면들이
눈에 띄고 또 다르게 해석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2장의 아이가 3장의 아이와 부딪히는 장면 전환
그리고 3장의 아이가 아빠에게 엄마는 자신을 좋아한다 답할 때에
1장의 내가 정말 좋은 엄마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난데없고 주책맞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 얘기를 하는 그 순간에 나시예 배우님의 표정이 금세 바뀌는 장면이 참 좋았다.
극에는 등장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이 상상되고 그려질 만큼
지금껏 아빠에게는 전혀 보여준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지을 때에 말이다.

고작 7살인 아이가 자연스럽게 비상등을 켜고,
네비게이션에 집주소를 입력하는 모습이
아빠와 있을때면 이런 불편한 상황이 종종 있었겠구나 짐작케했다.

그럼에도 엄마가 아직 같이 산다는 사실이
아이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하는구나하며
나도 모르게 안도하게 될 만큼 살아숨쉬는 연기를 하는 배우님이라니

‘당신’이라는 단어 하나에 꽂혀
정작 본인은 기분대로 아이를 어느새 ‘야’나 ‘너’로 부르고 있다는 것 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그저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거냐’며 사랑을 갈구하기에 급급한 아빠

그런 아빠와 아이의 장면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어린이 보호구역입니다.
하는 네비게이션 안내문구가 흘러나온다.
원작에는 없는 디테일한 부분들에
자꾸 극의 장면들을 곱씹어가며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에피소드마다 지켜보는 관객까지도 힘들 만큼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위태위태하고 복잡한 감정을 가진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4장에서 그리고 7장에서의 김철영 배우님이 맡은 배역이 딱 그렇다.
가부장적이고 꼰대같은 면모를 가졌지만, 아들에게 오히려 맞고사는 아빠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아빠 같은 결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의 두 아빠를
한 작품 안에서 어떻게 그렇게나 잘 소화해낼 수 있을까

4장에서 아빠는 시체처럼 소파에만 앉아있는 아빠고
7장에서 아빠는 의자에만 앉아있는데도 공포를 느끼게하는 아빠이다.

서보찬 배우님
엄마에게 작은 하소연도 하지 못하던 3장의 어린 10살 아들은 온데간데 없고
꼰대라는 둥 시체라는 둥 서슴없이 아빠에게 막말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한다.

이렇듯 같은 배우님들이 번갈아 등장하며 여러 인물을 연기하는데도
전혀 이질감이 없이 쉽게 장면에 녹아든다.



7장의 아들은 이미 자신의 아이까지 있는 엄연한 어른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의 말 한마디를 거역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버지 같은 아버지는 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아들은 그렇게 살길 원하지 않아서
애꿎은 안경알을 꾹꾹 누르며 바지를 꼭 쥐며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맞서본다.

특히나 앉으라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벌벌 떨며 갈등하는 연기에 눈물까지 쏙 빼놓고야 말았었다.

그래놓고서는 찬물을 확 끼얹듯
쟤 요새 회사에서 무슨 일있니
라는 대사라니

그러니 이런 대사들이 어떻게 마냥 웃기기만 할 수 있을까
앉지도 그렇다고 그의 말을 거스르기도 힘겨운 아들이 얼마나 어렵게 꺼낸 용기였는데,
그마저도 전혀 와닿지 못하고 바스러지고야 만게 아닌가


그렇게 강렬하고 격정적인 연기를 하는 와중에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 앉아 과일을 깎는 문재경 배우님의 연기가
얼마나 섬세하고 인상적이었는지는
얼마나 압권이었는지는 굳이 말하는 것이 입이 아플 정도이다.

사실 7장에서의 문재경 배우님이 맡은 배역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수 있는 인물인지 모른다.
재경 배우님이 연기하신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 같다.
어떻게 그런 일상적인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그렇게나 뒤흔들어 놓으실 수 있는걸까
이 아이를 여러번 관람할 수 있다면 꼭 7장에서 배우님의 연기도 집중해서
눈에 담아봤으면 좋겠다.




5장의 이야기는
첫 관극때보다 두번째 세번째에 더 많이 울었던 장면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여러번 관람하면 좋을 것 같다 추천하는 큰 이유 중 하나인데
아쉽게도 이미 이 공연 후기를 작성하는 시점에는 공연이 이미 끝나버린 이후이다.
초연에 이어 앵콜공연까지도 매번 전석매진
인기가 있는 작품은 이유가 다 있는거라곤 하지만 관람추천 후기를 작성하고싶어도
이건 뭐 매번 자랑글이 되어버리고마니...
이건 다! 극단 휴즈 연출님 배우님들이 모두 너무 잘나신 탓!
특히 김세연 배우님이 아주아주 잘나신 탓!!

아이가 없지만 아이들을 너무 좋아하는 LG 트윈스 팬인 부부에게
혹시 딩크족이냐 묻는 장면에서
후의 내용을 모르는 관객들 모두 웃고 있었는데
딩크족은 아니라는 대답에 안심하듯 확 밝아지는 미혼모의 모습이
너무나도 슬퍼서 나는 아주 말그대로 펑펑 눈물을 쏟고야 말았었다.

아이 원하지 않으세요? 입양 할 생각 안해보셨어요?
무례하고도 눈치없는 말들을 덥석덥석 해대는 이상한 여자

작품을 여러번 볼때마다 아이를 주겠다는 저 이상한 결심을 하게되기까지
저 여자에게 어떤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이 아이를 정말 사랑하지만 엄마로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건 대체 어떤걸까
한번도 엄마여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짐작해보기에도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두분은 부모같아요 말하며 글썽이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아이를 정말 사랑하지만 엄마로서 사랑하지는 않는 경험은 물론이고
엄마여본 경험도 역시 전혀 없는 것은 관객인 나뿐아니라
배우님도 마찬가지일텐데 대체 어떻게 저런 연기를 하실까 매번 놀랍기도 하다.

5장에서 배우님이 연기하는 인물은 우울증이 있다고 나오지만
아이를 주겠다 말하는 모습은 눈치없고 이상한 여자라 보일만큼 밝다.
어떨 땐 일어나기도 힘들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것도 어렵다며
부부와 눈을 맞추며 얘기를 이어가는데
고개를 끄덕여주는 부부의 다정함이 어째선지 고마울만큼
너무도 안쓰럽기도 하다.

8장에서는 어딘가 무기력하고 지쳐있는 모습이다.
엄마의 고백과 사과에 한쪽 구석에서 눅물을 애써 참으려고
애꿎은 집안일만 하는데도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까지.

소리내어 크게 울거나 눈물을 제대로 펑펑 쏟아내지도 못한다.
끅끅 눈물을 삼키느라 얼굴이 떨리고 어깨가 떨리고
조금만 더해도 자칫 과하다 느껴질 수 있는 울음을
어떻게 딱 적정선 만큼만 기가막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리 사는게 힘들고 팍팍해도 그렇지. 너 그러는거 아니다
사실 그 말은
8장의 어린 딸에게 냉정하게 굴던 예전의 자신에게 엄마가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겠지


8장에서 김미숙 배우님이 정말 미안하다며 딸에게 고갤 숙일 때
이미 엄마가 나간 텅빈 방안에서 ''그래 엄마 잘가'' 답할 때에야
비로소 서툰 부모로부터 겪었던 모든 이야기속 상처들이 조금은 치유되는 듯 하다.

사실 8장의 장면은 내용도 그렇고 구도도 조명도 흘러나오는 배경음까지도
아주 작정하고 관객들을 울리겠다고 만든 장면 같았다.
나는 그런 작정하고 만든 장면에도 별 감응이 없는 편인 대문자 T인데
그런 냉정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메마른 나를 볼때마다 울리는 작품이다.

대문자 F인 모 관객은 옆에서 눈물 콧물 쏟다못해 아주 오열 통곡을
할 정도



웃음 요소가 많은 장면인 엄마와 딸의 갈등을 그리는 6장의 이야기는
그래서 참 마음이 아팠다.

아들뻘인 네 남편이 날 보는 시선이 어떤지 보라는 엄마의 말은 제쳐두더라도
엄마는 내가 뭔갈 해낼 수 있단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을거야
좋은 엄마가 되기보단 ‘엄마보다 더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다짐과
뒤틀린 인정욕이 더 커보였던 1장의 나와 6장의 딸과 엄마가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6장의 딸은 아무리 애쓰고 최선을 다해도 엄마로부터 인정받고 이해받긴 어렵겠지
서로를 좀처럼 이해할 순 없을 엄마와 딸이 상대의 말은 듣지도 않고
마구 쏟아내는 말들은 매번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그럼에도 매번 마음에 꽂히는 딸의 대사는
엄마가 엄마이듯 나도 엄마야
였다.

엄마가 엄마이듯
그의 아이도 어느새 누군가의 엄마라 불릴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어엿한 어른으로서 어엿한 인격체로서 그 자체로 존중해주지 못하고
자꾸 아직도 어린 자식 대하듯 간섭하고 상처주게 되는 얽힌 관계.

모든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좋은 엄마일까
좋은 부모일까
에 대한 질문의 답이 아닐까


연극이 끝나고나서
나는 문득 훗날 6장의 엄마가 8장의 엄마처럼
자신의 서�I에 대해 머리숙여 사과할 수 있을지
그게 궁금해졌다.

대문자 T의 눈물을 이렇게나 쏙빼놓고 과몰입하게 만든 극단 휴즈가
공연 소식만 기다리고 있는 팬들을 위해서라도
어서 빨리 하루라도 더 빨리
또 멋진 작품으로 크나큰 여운을 남겨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부족한 후기 간략하게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