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씨 일가>는 말 그대로 장씨 집안의 이야기다. 3세대가 함께 살고 있는 장씨 집안은 모순적인 유교적 가치관을 고수하는 할아버지와 자신의 존재의식이 흔들리는 대학교수이자 주인공인 아버지 장춘자. 그의 세 자녀가 극을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그 장씨 일가에 찾아온 한 사람이 그 집안이 일렁이는 문제가 강렬한 파도를 타고 움직인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제자..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인물의 기세에 눌린 영문과 교수 ''장충재''는 스스로를 "포스트모던"의 대표로 꼽는다. 어린 시절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못 미더운 존재로 여기던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으며 자란다. 게다가 종교에 심취한 어머니(불교)와 아내(기독교) 사이에서 어떤 결정도 스스로 내리지 못한다. 마치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한 그는 바다 위를 부유하는 난파선처럼 위태로운 삶을 살아간다.

극은 장충재 교수의 아들이 연예인으로 데뷔하기를 꿈꾸며 노래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후 할아버지인 장충재 교수의 아버지가 제사를 이유로 온 가족을 집으로 불러 모은다. 딱 맞춰서, 주인공은 의문의 젊은 여성과 집으로 돌아온다. 한때 자신의 제자였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상대라며, 집안으로 끌어들인다.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관념과 윤리를 스스로 모두 해체해버린다. 집에서 당당하게 외도를 하는 장 교수는 집안이 그저 조용하기만 바란다. 굉장히 많은 문제가 얽혀있지만 그저 지금과 같은 정도만 유지되어도 나쁘지 않은 듯싶다. 가족 누구에게도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저 자신의 욕망의 대상인 제자만 바라보는 생활을 계속한다.

문제는 장충재 교수가 집으로 데리고 온 여인이 자신의 둘째 딸과 함께 일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주인공은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아내 역시 그가 데리고 온 여자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만 종교에 심취할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이고, 자신은 자신만의 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연극 속 모든 인물들은 자신만의 세계가 분명하고, 그 세계에 홀로 존재한다. 가족이지만, 같은 집에 머물지만 모두가 다른 세계 속에 혼자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종교에, 누군가는 자신의 세계관에, 누군가는 모든 사상을 초월한 세계에, 그리고 주인공은 자신의 욕망 속 세계에 혼자 존재한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여자와 함께 그 세계를 공유한다고 생각했지만, 극의 클라이맥스에 그는 깨닫는다. 모두가 자신을 소외하고 자기 혼자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기가 만든 세계 속에 자신이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결정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벌이고 만다.


연극 햄릿에 심취한 주인공은 자신의 삶의 순간순간 햄릿 대사를 읊조린다. 집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허용된 방안에서만 읊조리던 대사가 그의 방 밖을 나서는 순간. 그는 햄릿과 같이 비극적인 결정을 내린다. 자신이 사랑했던 오필리어를 죽음으로 떠밀듯, 사랑하는 여인의 술에 독을 타고 자신도 독이 든 술을 마신다. 그리고 방 밖으로 뛰쳐나가 아버지를 향해 칼을 휘두른다. 자신의 세계였던 그가 방을 나선 그가 한 결정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대상이자, 자신을 끊임없이 누르던 아버지에게 칼끝을 겨누는 것이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 극단적인 결정을 한다. 대학 연극부 소품실에서 훔쳐 온 햄릿의 칼로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다. 이후 빨갛게 물든 무대에 주인공과 주인공 방에 걸려 있던 난파선 그림만이 남는다. 이 험난한 바다와 같은 세상 속에 모두 난파선처럼 이리저리 요동치는 삶을 이 두 가지 오브제가 <장씨 일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극작가 김영우는 존속살인까지 벌어지는 비극적인 상황을 주인공을 통해 보여준 이유가 무엇일까. 변하지 않는 아버지, 어머니, 아내와 집안에 들어가지 않은 채 벤치에서 노래 부르는 아들, 집 밖에 나가 있는 두 딸 사이에 끼여 있던 그가 은연중에 느꼈던 것이 무엇일까. 포스트모던이라고 지칭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게 강하게 부여잡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세계에 어울리게 부유하며 사는 존재가 되지 못한 그 중간자적 존재인 장 교수의 비뚤어진 욕망을 담아낸 것이 아닐까.

<장씨 일가>에서 나온 문제의식에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라는 단어가 익숙한 시대에 살아온 나에게 ''개인화'' 문제는 문제이지만, 이 때문에 고뇌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이 연극은 부모님과 자녀가 함께 보면 좋을 연극이란 생각이 든다. 같은 작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서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비극적인 현실을 다룬 작품으로 마음을 가볍게 만들기보다, 힘겹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담고 있는 고민을 작품화했다는 점에서 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포스트모던 시대, 개인화가 심해질수록 더더욱 필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공감이기 때문이다. 각 세대가 고집하고 있는 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생각과 고민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연극은 그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극으로 표현했다. 조금 더 과장하여 사람들의 특징을 잡아낼 수 있도록 돕는다. <장씨 일가>에 나오는 인물과 똑같은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비슷한 면모를 가진 사람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연극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큰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