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내 책상서랍 어딘가에는, 그리고 거실장 구석에 먼지처럼 쌓인 비닐커버속에는 낡은 필름이 언제나처럼 있었다. 백열등에 비춰보면 반전된 색깔을 띄며 추억과도 같은 작은 이미지들이 보였다. 보자마자 이건 언제 어디였던가.. 금새 이야기를 줄줄 읊을 수 있는 확실한 기억이 찍힌 것들도 있고 개중엔 무슨 사진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흐릿한 잔상으로만 남은 필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작은 이미지 하나하나는 언제나 과거 어딘가에 남겨진 나에게로 향하는 연서의 불쏘시개였다. 오늘 이 작품을 보며 나는 이젠 먼지 쌓인 채로 찾는 이도 거의 없던 낡은 필름 하나를 발견한 것만 같았다. 언제든 솜씨좋은 사진사가 현상기에 넣고 윙윙 돌리면 그 작은 반전된 기억들이 깔끔한 사진이 되어 나오는 것처럼 내 기억속 흐릿한 잔상들속에서 빛바랜 필름같은 이야기들이 반짝이는 옷을 입고 내게로 걸어나와 내 손을 잡고 날 다시 이끄는 것 같았다. 마치 울엄마처럼. 엄마 손을 꼭 잡고 엄마 품에 기대어 가슴 시린 시절을 통과하며 내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그렇게 찬란했던 내 유년이 그리고 엄마가 또 그립다. 그래 어쩌면... 내가 그리운 것은, 대책없이 다만 엄마만 있으면 종내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나인지도 모르겠다. 까만 밤을 뚫고 다시금 달려 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날 닮은 아이들이 기다리는 나의 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위로인지 토닥임인지, 아님 그저 미련인지 며칠 후 울엄마 49재를 앞두고 오늘 이 마당극이 있어 참 다행인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