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무대가 좋은 건 그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배우라는 사람들을 통해서 쏟아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하나의 희곡이, 그 속에 있는 한 사람의 대사가 배우의 입을 통해서 쏟아졌을 때 관객들은 말의 힘을 경험하게 되어요. 그건 지문에서 볼 수 없는 말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이 어떤 배우의 어떤 생각을 거쳐서 쏟아졌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배우는 그 장면의 그 캐릭터가 숨막힐 듯한 답답함에 쌓여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고 어떤 배우는 같은 배역을 연기하면서도 그 배우가 한없이 순진하고 한편으로는 바보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배우의 해석에 따라 캐릭터는 달라지고 그에 따라 대사는 다른 의미를 가진 말이 되어요. 관객들은 배우의 해석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 대사의 의미와 만나게 되어요.
베니스의 상인을 연습하기 위해서 배우들이 모여요. 오늘따라 연출이 좀 늦어요. 연출이 오기 전까지 조연출이 배우들의 연습을 진행해야 하는데 조연출은 막내 나이에다가 요령도 부족해 보여서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고 비꼬기를 좋아하는 선배의 타깃이에요. 다행이 선배의 그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는 여자배우 한명이 그녀를 편들어주면서 간신히 낭독 연습이 시작되어요. 무대 위의 장면들은 낭독 연습과 무대의 장면을 번갈아 보여 줘요. 그러다가 누군가 의문을 제기해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정말 나쁜 사람일까요??”라고 물어요.. 셰익스피어에게 물어보면 그에 따른 답이 나올까요?? 아마도 셰익스피어라면 그 희곡을 쓸 때 선정한 전제가 있으니 답을 금새 내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 배우들의 의견들은 각자의 시선에 다라 달라요. 어떤 배우들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견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의견의 파도에 휩쓸리기도 해요. 의견은 서로 대립되다가도 모이고 모였다가도 완전히 모이지 못하고 흩어져요. 누군가 말해요. “이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라고. 그때 누군가 대답해요. “연극인이라면 꼭 해볼 필요가 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라고 말이에요. 배우들이 갑론을박 하면서 생각은 점점 확장되어 선과 악의 구분이 있는 건가? 라는 의문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요.
연극 안에서 논쟁의 확장을 보면서 좀, 너무 많이 간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쯤 연극은 한동안의 논쟁을 마치고 마지막 장면을 향해 달려가요. 마지막 장면은 처음 연극이 시작했을 때 그 장면이지만 장소도, 배경도, 인물의 분위기도 꽤나 많이 각색되었어요. 아쉽다면 그렇게 무대 위에서 논의 되었던 샤일록이 정말 나쁜 사람일까? 에 대한 각색은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논의의 끝에 변화가 있고, 그 변화를 관객들은 새로운 해석과 시도로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지 않을까요? 생각은 사람을 생각의 방향대로 움직여요. 그렇기 때문에 배우는 생각해야 하고 그 안에서 다른 해석과 경험들을 관객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럴 때에야 무대는 비로소 확장되고 관객은 확장된 무대 속에서 배우들의 생각과 마주칠 수 있어요. 베니스의 상인은 나에게 무대를 움직이는 배우들과 그들의 생각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 준 연극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