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나의 주된 정서는 답답함이었다. 연극 또한 답답함이 있지만 거기에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나는 딱딱하게 읽어내려 갔지만 연극은 죽은 활자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류보비나 그의 오빠가 한없이 답답하고 꽉막힌 인간으로만 보였는데 무대 위에선 그들의 무력감과 당혹감이 더 잘 보이더라. 그들은 밀어닥치는 세대의 변화를 감당할 힘이 없어 자꾸만 회피하고 눈을 돌린다. 일생을 타인의 손에 의지해서 편안히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결정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일을 해야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그런데 무대 위에는 동시에 여러 세대가 포진하고 있다. 류보비 남매와 피르스로 대변되는 구세대. 농노의 장이었던 피르스는 농노해방이 대재앙이었다고 말한다. 농노해방이 되었어도 피르스는 아무데도 안 간다. 80이 넘어 허리가 굽고 걸음이 더딘데도 자켓이나 담요를 챙겨와서 류보비와 오빠를 시중든다. 50줄에 들어서서도 그들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고 누군가가 시중들어 주지 않으면 실수를 한다. 로빠힌이 상징하는 새로운 세대. 대대로 농노의 자식이지만 지금은 어엿한 자영농이고 지난 여름엔 양귀비를 심어 4만 루블을 벌었다. 돈 버는 일에 재능이 있고 류보바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다. 그런데 바랴에게 왜 청혼을 못 할까. 여튼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경제적인 이득을 취할 줄 알되 은혜 또한 아는 사람이다. 돈과 생계와 현실을 뛰어넘어 이상향을 바라보는 또 한 쌍의 젊은이들. 아직 서른도 되지 못한,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고 물질에 사로잡히지 않아서 벚나무 동산 아니라 무엇이라도 버릴 수 있고 그렇기에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젊은 대머리 대학생과 아냐가 러시아의 미래를 책임질 그들이다. 그 주변부에는 귀족의 찌끼를 먹고 자라 그들의 겉모습만 흉내내는 두나샤나 겉멋 들어 외국이 좋다는 야샤라는 부류도 있고. 체홉 특유의 연극적인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벚나무 동산은 모든 상황이 실내에서 벌어지고 반복되고 지리한 대사들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야기는 가족을 중심으로 그 주변까지 확대되지만 결국 가족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그 가족은 여러 세대의 여러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이 곧 러시아이다. 류보비는 벚나무동산이 경매에 부쳐진 상황에 파티를 열고 춤을 추고, 얼굴을 가린다. 내가 느껴지는대로 말하자면 얼굴을 가린 것은 맹목적이고 막무가내이거나 회피일 수도 있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질 때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가린다. 눈을 가린다고 바닷물이 사라질리 만무하지만 당장의 두려움은 잠시 잊고 싶은 것이다. 류보비는 벚나무 동산을 경매로 잃을 판인데 그 사실을 어찌 할 수가 없으니 자꾸만 눈을 가리는 형국이다. 파티는 곧 파하고 가슴 졸이며 벚나무 동산의 향방을 기다리지만 경매에서 팔렸다, 라는 소식 말고는 수 시간이 지나도록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아 애만 태운다. 할 수 있는 액션이 고작 눈 가리고 쓰러지는 거라니, 이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귀족같으니라구. 아마 많은 이들이 그랬을 것이다. 몰아치는 시대의 급물살을 피하지도 견디지도 못하고 두렵고 떨리는 맘으로 눈만 감았을 것이다. 그런다고 물살이 멈출 리 없건만 그들은 물살만 원망하고 지난 세월만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몰락이 누군가에게 기회가 되기도 하는 법, 로빠힌은 조상대대로 농노로 일하던 저택의 오랜 영지인 벚나무 동산을 6만 루블에 사들인다. 그의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알면 놀래자빠지리라 기뻐하면서도 그는 어쭙잖은 귀족 행세를 할 생각은 없다. 그는 곧장 벚나무를 베어내 버린다. 거기 별장을 짓고 도시인들에게 임대할 생각이거든. 그저 바라보고 즐기는 벚나무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그게 백과사전에 실렸건 어쨌건 말이다. 이 농부의 호기가 어쩐지 맘에 든다. 그러면서도 바랴에게 청혼을 못 하는 이유는 도통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무가 베어질지라도 그들의 삶은 계속 된다. 무대는 벚나무동산의 저택 여기저기서 뜯어내 목재와 문으로 가리워진다. 이제 이집엔 아무도 안 산다는 뜻이다. 쿵. 쿵. 쿵. 쿵. 벚나무를 베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제는 늙어버린 전직 농노장 피르스가 저택 앞에서 눈을 감는다. 꽃보다 나무가, 생명의 고단하고도 부단한 본질에 더 가깝다는 생각. 그러니 어쩐지 벚꽃동산, 이라고 했을 때는 한때의 영광, 찰나의 기쁨같은 이미지였다면 벚나무동산이라고 하니 이게 영속성을 가질 것만 같다는 거지. 꽃이 지고 나무가 베어져도, 그 뿌리가 살아서 다시 어느 날 꽃을 피울 것같은, 강하고 끈질긴 생명을 보여줄 것 같단 말이지. 한때의 영화는 갔어도 여전히 살아남는 무엇. 그래서 이 극, 서글픈 결말에도 불구하고 영 끝은 아닌 것 같은 느낌.

백년전의 작품을 현대의 정서와 공감이 잘 맞도록 연출이 되었고 캐릭터마다 특징있고 재치있게 연기를해서 좋았습니다

연출이 너무나 아쉬웠다. 무대 뒤에 걸려있는 벚꽃사진은 안하느니만 못할것같았고, 나름 생각이 있었겠지만 샤를로따를 없애버리고 그 시간에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의 춤과 라넵스까야의 행동....대체 왜 손수건을 뒤집어쓰고 쓰러지는건지?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후반부를 참고하자면 복선을 준것같기도 한데 그런것이라면 복선을 너무 대놓고 줘서 실망스러웠다.
그저 내 취향일뿐이지만 시도때도 없이 정면을 바라보며 대사를 치는걸 계속 보고 있자니 참 답답했다. 의도는 알겠는데 대체 왜 상대방을 보고 말을 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됐다. 정말 중요하고 관객에게 직접 주고싶은 말이 아닌 이상 상대배우에게 치는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뭐 시도때도 없이 관객석을 바라보며 상대방에게 하는 말을 하고 있는걸 보자니 극에 대한 몰입이 쉴 새 없이 깨져갔다.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인물들의 연기. 물론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맘에 든것은 아니지만 특히 로빠힌, 뻬쨔, 피르스의 연기가 참 인상깊었다. 로빠힌이 눈물을 쏟아내며 자신이 영지를 샀다는 그 명장면을 연기할 땐 정말 감동적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들었던 인물은 피르스. 다른 배우들이 주가 되는 장면에서도 쉴 새 없이 자신의 일을 하고 신경쓰는 것이 참 피르스답다고 생각했다. 피르스라는 그 인물 자체를 본 것 같아 기쁘다.

벚나무 동산을 제정 러시아로 생각했을 때 나태한 귀족사회의 몰락의 이유, 일하는 농민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통한 신분 상승등 한편의 연극속에서 벚나무 동산의 경매를 통한 해체, 그 와중에서도 자각하지 않는 지배세력의 풍조, 암울한 시대적 몰락상을 담담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놀땅의 작품은 늘 찾아서 안 빼놓고 보고있는데 이번 벚나무동산도 참 좋습니다.
러시아에 유학하고 매우 러시아어에 능통한 지인이 벚꽃동산으로 흔히 알려진 제목은 사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벚나무동산이 맞다고 하는군요.

3시간정도 되는 연극이지만 두시간으로 줄이면서도 핵심이 전혀 빠져있지 않고
의상등을 간소화했으면서도 지나치게 현대적이지도 않고 간소한 소극장용으로 비용이나 여러면에서 영리하게 작품을 만드신 듯합니다.
놀땅의 배우들외에도 특별히 신덕호, 장용철 등 외부배우들도 함께 하셔서 평소 놀땅작품과 조금 다른 색이 나온 것같기도 하구요

극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영지의 저택을 문을 걸어잠그듯이 무대를 벽체를 이용해 모두 막아버리는 연출은
정말 좋은 아이디어같습니다.
소극장에서 볼 수있는 최고의 벚나무동산을 본 듯합니다.
로빠힌의 해석도 상당히 인상적이었어요. 지금까지 생각해온 로빠힌보다 많이 늙은 듯?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제 3일밖에 남지 않았다니 많이 아깝네요.
못보신 분들 얼른 챙겨보셨으면 합니다. 1+1도 되서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