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만드는 사람 똑같은 세상, 때로는 현실보다 더 가혹하거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연출가라고 생각해요. 공연이 올라가기 전까지 협업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배우와 스태프들을 연결하는 것이 연출의 기능적인 역할이고, 그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연출가의 몫인 것 같아요.



거짓말하지 않고 세상을 말할 수 있는 방법 신문사에 계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나는 기자가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 때 ‘펜을 들고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펜을 들고 진실을 말하기는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아서 겁을 먹고 도망을 갔던 것 같아요.(웃음)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어요. 좋아하는 그림을 보러 다녔던 혼자 떠난 배고픈 여행이었는데, 그 이후로 세상이 다르게 보였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첫 기수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뭘까?’라는 요동을 느꼈어요.


연극원을 졸업하고, 국립극단 객원 조연출로 2년 정도 작업하다가 연극원 초대 원장님이셨던 김우옥 선생님께서 열어주신 어린이 공연을 제작했죠. 당시에 다른 뮤지컬 제의도 들어왔었지만, 다른 일을 선택해야 할 만큼 당시에 했던 어린이 공연 작업들이 지루하지 않고 행복했기 때문에 고사를 했던 시점이었어요. 그 때 뮤지컬 번역, 작곡가로 유명한 박천휘라는 친구가 “뮤지컬해븐의 <씨왓아이워너씨>를 같이 해보자, 아주 연극적인 작품이다”라면서 대본을 보여줬는데 이 작품을 놓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 씨왓아이워너씨>라는 좋은 작품을 시작으로 뮤지컬 연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연출을 시작하면서 전 프랑스국립연극원 원장인 다니엘메스기쉬, 유덕형 선생님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배우, 교감의 힘을 믿는다 배우들에게 “무엇이 당신을 움직이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물어요. 주, 조연은 물론이고 앙상블에게도 그냥 그림으로 보이는 걸 요구하지 않아요. 늘 배우들에게 “네가 지금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움직이는지 궁금해”라고 묻고, 모든 배우들이 그것을 찾을 수 있도록 해요. 이런 질문들을 던지면서 동시에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거죠. 종종 자신의 안에 있는 것들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배우들도 있는데 그럴 때 가장 힘들어요. 배우들 안에 있는 무엇이, 배우의 영혼이 저와 배우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죠. 배우들의 영혼이 움직이지 못하면, 연출인 저도 움직이지 못해요. 그래서 존재감이 확실한, 영혼을 가진 배우들을 좋아해요. 저는 그렇게 사람들과 만나면서 일어나는 교감과 반응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연출인 것 같아요.




기본을 지킨다, 고지식할 정도로 연습이나 출강중인 수업시간에 단 한번도 지각할 적이 없을 정도로 ‘기본’에 있어서 엄격한 편이에요. 작업은 한쪽의 고통과 한쪽의 환희로 완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굉장히 혹독한 연습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편이에요. 연출노트 내용이 시적(poetic note)인 편이라 배우들이 바로 알아차리기 힘들다는 약점이 있지만 배우들이 그 내용을 해독하면서 저절로 갈 길을 찾게 된다는 시선에서는 강점이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웃음) 제 강점과 약점은 맞닿아 있는 것 같네요.



지금, 왜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대본이 좋고, 음악이 좋아야 해요. 이제 막 시작하는 공연일 경우에는 의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가 지금 왜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에 무게를 둬요. 공연과 공연이 겹칠 경우에 참여하지 못하고, 텍스트와 음악이 나쁘면 못하고, ‘왜’하는지 모르겠으면 못하고, 프리 프러덕션이 2개월 이하인 작품은 못해요. 이렇게 하다 보니 일 년에 1~2편 정도의 작품만 하게 되네요. (웃음) 즐겁게 쇼로 풀어내는 공연보다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스프링 어웨이크닝>과 같이 배우들의 영혼이 필요한 공연을 좋아해요.





<시계 멈춘 어느 날> 힘들게 작업했지만, 제가 정말 사랑하는 작품이에요. 하노버의 터널 정면에 있던 이라크 아이의 사진을 보고 이 작품을 생각했어요.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였는데 사진 속 아이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을 건네면서 저를 불러낸 느낌이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바로 작업을 시작했고, 전쟁에 관한 일곱 가지 이야기를 담은 무언극 <시계 멈춘 어느 날>을 올리게 됐어요. 상도 많이 받았고,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 한국 공연 최초로 올라간 작품이에요. 진득하게, 많은 것을 담았던 것 같아요.




<3월의 눈> 배우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깊이로 완성된 공연이었어요.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장민호 선생님은 정말 아름다운 배우에요. 배우의 힘, 영혼이 저절로 보일 정도로 긴 여운을 준 공연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오늘이 나의 미래 전 미래를 꿈꾸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현재가 가장 중요한, 현재성이 강한 사람 이에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당시에는 그 일을 열심히 했고, 지금은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버티세요 공연을 꿈꾸는 친구들에게 “버텨”라는 말을 해요. 그 버틸 수 있는 힘은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분명하게 아는 거에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하게 있는 사람이라면 버틸 수 있거든요. 이 작업은 고통스럽고, 어렵고 힘들어요. 하지만 고통, 환희, 외로움은 같이 오는 거잖아요. “잘 버텨주세요, 그리고 나중에 만나요”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순간을 즐기세요 무대예술은 순간의 예술이라는 것을 기억해주시고 순간을 기억하고, 순간을 가지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정리 : 강윤희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angjuck@interpark.com)
사진: 스튜디오 춘_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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