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공연의 시각적 환경을 구성하는 행위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면, 창작 초연작 같은 경우는 대본 창작 과정에 관여하기도 하고 이미 완성된 대본이라고 하더라도 장면의 시각적 구성을 위해 순서를 재배치 하는 경우도 있어요. <영웅> 같은 경우는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 넣기도 하고 순서를 바꾸는 등 대본 창작 과정을 같이 해나갔죠. 이미 창작된 공연일 경우에는 우리가 이 작품을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갖고 해석을 해서 개념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이 작품을 우리 시대에 왜 하고 왜 보는가를 생각하고 작품을 시각적으로 다시 구성하는 게 필요하죠.

무대미술이 초기단계부터 참여했을 때 작품 완성도가 높아집니다. <갬블러>는 독일 원작인데 원작에선 카지노 이름이 ‘자금성’이에요. 유럽권에서는 자금성이 흥미로운 곳일 수 있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전혀 흥미로운 곳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걸 인도의 무굴제국으로 바꿨습니다. 그러면 원작은 그대로 있어도 음악의 편곡이 바뀌고 의상, 안무, 연기패턴이 바뀌겠죠. 소품과 조명도 바뀌어야 해요. 모든 게 바뀌는 것이죠.



대학교 연극반에서 처음 무대 디자인을 시작했어요. 대학 입학해서 동아리 활동을 뭘 할까 고민 하다가 그림, 사진, 연극 셋 중에 하나를 하고 싶었죠. 그런데 셋 중 사진 동아리는 카메라가 없어서 못 들어가고(웃음), 연극반에서 큰 그림을 그리자 싶어서 연극반에 들어가 4년 내내 무대장치를 담당했어요.

대학은 경영학과에 들어갔는데, 이유는 재수시절 매일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면서 봐왔던 건물을 보며 이 건물의 주인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 회사 오너가 다닌 연세대를 갔죠.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실제로 대우그룹에 취직을 했어요. 그런데 다니다 보니 제가 일정한 시간에 뭘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요. 매일같이 출근해서 매일 비슷한 일을 하는 이런 방식이 저와는 잘 맞지 않았어요. 결국은 평생 만족하면서 살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대학 때 연극반에서 했던 무대 미술을 하기로 결정했어요. 그 당시엔 직업적으론 좋은 선택이 절대 아니었어요. 지금도 대기업 다니다 그만두고 무대미술을 한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다 말리겠죠. 게다가 당시엔 공연시장 규모가 훨씬 작았잖아요.



그래도 회사를 그만두고 홍대 대학원에서 무대디자인 전공 과정을 공부했어요. 입학하자마자 바로 활동을 했죠. 산울림소극장에서 했던 <숲속의 방>, 연우무대에서 했던 <변방에 우짖는 새> 등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무대미술 활동을 했습니다.



저는 단순화하기를 좋아합니다. 장식적인 것을 싫어해서 장식성을 제거하고 본질에 충실한 단순화를 추구하죠. 작업 스타일은 꼼꼼해 질 수밖에 없어요. 개념이고 이미지이지만 결국은 mm로 표기해야 하니까요. 치밀하지 않으면 장면의 전환과 통일성이 맞아 떨어지기 힘들죠.



장점은 작품 해석. 개념을 도출하고 거기에 맞는 시각적 구성을 하는 건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미술에서 무대 디자이너가 된 게 아니고 연극을 하며 무대 디자이너가 됐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 글 쓰는 것,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발표는 하지 않지만 소설을 쓰고 읽기도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대학 때 하루에 한편 정도 단편소설이나 시를 읽었어요. 그런 게 훈련이 돼서 작품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기능적인 것, 기술적인 게 강하기도 하죠.

그에 못지 않게 단점도 많이 있는데, 저는 장식적인 것을 잘 못해요. 우아하고 명랑하고 발랄한 종류는 전혀 저의 성격에 맞지 않기 때문에 잘 하지도 못하죠. 장중하고 비극적이고 쪽을 선호하기도 해요. 양쪽을 다 좋아했으면 좋겠지만 사람이 어떻게 양쪽을 다 좋아하나요(웃음).



지금은 <영웅>이에요. 그 전까지는 <명성황후>였어요. <명성황후>는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무대미술을 극찬 받았던 작품이고. <영웅>도 마찬가지로, 뉴욕 공연을 하면서 언론 등에서 무대미술에 대해서는 다들 극찬을 했죠. 어떤 분들은 저에게 극장의 램브란트라고 말하기도 했고, 무대 기술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 공연을 가서 보라고 했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가지는 제가 애국에 관심이 높아요. 어려서부터 집에 독립운동가들의 전기, 사진 등이 되게 많았어요. 그런 것들을 읽으면서 자라서인지 안중근 의사 같은 분들은 저에겐 정말 영웅이죠. 그분의 의거를 다룬 작품을 내가 한다, 그 자체로 영광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작품을 할 때와는 기본적으로 마인드가 달랐죠. 중요성이 덜하고 더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 작품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가 이 작품을 앞에 두고 잠시라도 게으를 수 있을까, 이 작품을 내가 잘못한다면 이건 순국선열들의 대한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첫 공연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어요.




1997년 <명성황후> 뉴욕공연을 처음 갔을 때, 극장쪽에선 최소 15일 동안 무대 작업을 해야 하는 작품이라고 했지만 우리 쪽에서는 제작비 문제 때문에 일주일만에 설치를 하겠다고 했죠. 우여곡절 끝에 일주일 만에 설치하기로 하고 미국으로 가서 세트를 세웠어요. <명성황후> 이중 회전무대는 정말 고민 끝에 발명해낸 발명품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바퀴가 회전체에 붙어있지만 이건 바퀴가 바닥에 붙어있어요. 그래서 초경량 화 할 수 있었고 조립하는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어요. 그곳에서도 바퀴를 꺼내서 바닥에 붙이고 있으니까 뉴욕에 있는 스탭들이 팔장을 끼고 저게 돌아가겠냐며 자기들끼리 말을 하더군요. 그런데 막상 시운전에서 돌아가니까 이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감탄을 했죠. 그날부터 우리를 대하는 모든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이 사람들이 참 잘 준비해온 사람들이구나. 좋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구나, 인정을 하더군요.

또 하나는 이번 <영웅> 초연 때. 2009년 10월 26일이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이고, 그날이 첫 공연이었죠. 이 공연을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장면이, 영상으로 달려오던 기차가 실물로 변하던 장면이었는데, 이 부분을 10월 25일까지 한번도 성공을 못했어요.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그 스트레스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공연 첫날이 됐는데 아직 성공 못했다고 공연을 연기할 순 없잖아요. 그날 객석 맨 뒤에 앉아서 가슴을 졸이면서 보는데 멀쩡하게 성공한 거에요. 그 순간에 안중근 의사님이 돌아와서 도와주시는구나,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나더군요.



우선 작품 해석이 좋아야 합니다. 단순히 작품 고증의 문제가 아니라 항상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왜 이 공연을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이 나와야 해요. 거기에서 개념을 도출해서 다음 단계는 적합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무대 미술가는 시인이자 화가이자 건축가이다. 시인이 눈으로 작품을 분석하고, 그걸 공유하기 위해 스케치를 하고, 그 다음엔 실제로 작업할 수 있도록 설계를 하고 모형을 만들죠.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빠지는 안 되는 겁니다.




공연 사업은 하루아침에 좋아지는 산업이 아닙니다. 특히 메이저급 공연이 세계적인 공연이 되기 위해선 국가 전체가 뒷받침 돼야 가능해요. 정부가 뒷받침한다고 되지도 않습니다. 사회전체 수준이 높아져야해요. 예를 들면 그 나라의 교통이 좋아야 하고, 그 나라의 철물점도 좋아야 해요. 그런 것들이 좋지 못할 때 좋은 공연은 나오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 좋은 극장이 아니면 좋은 작품이 나오기 힘든데 극장 건축가들이 극장에 대해 너무 몰라요. 좋은 극장이 아니라 너무너무 고생을 많이한 적이 많아요. 좋은 공연이 나오는데 극장이 방해하는 경우가 많은 거죠. 이 역시 갑자기 공부를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건축가들이 어려서부터 공연을 즐겨보면서 공연에 대한 이해가 깊다면 이렇지 않았겠죠. 설령 이해가 깊어도 마감 날짜가 촉박해도 안 되고요. 빨리 해치워야 하는 문화는 국민 전체가 가지고 있죠. 결국 너무나 많은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공연 시장이 커지려면 국민 전체의 문화수준, 경제수준이 높아져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층이 두텁지 못하고 젊은층 위주로 형성돼 있죠. 우리나라 뮤지컬이 세계시장으로 나가기 위해선 결국 사회전체의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활동 무대를 넓혀보고 싶어요. 브로드웨이 혹은 웨스트엔드에서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도록 하고 싶습니다. 좋은 작품을 하다 보면 기회가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국내에서 <아가씨와 건달들>, <에비타> 등을 했지만 늘 외국에서 했던 무대보다 뒤쳐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시각적으로 결정해놓은 것들에만 의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이미지 조사를 시키면 항상 잡지 오려 오거나 인터넷에서 무언가를 찾아서 붙여서 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남들이 이미 시각적으로 결정해 놓은 것들이거든요.
자기가 찾기 위해선 많은 소설, 시를 읽고 음악을 듣고, 여행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무대 디자이너에게 정말 필요해요. 그 중 가장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게 소설을 많이 읽는 거에요. 소설을 읽으면 계속 시각적 배경을 생각하게 되거든요. 읽을수록 훈련이 되죠.

또 한가지는 지금 사회가 제가 어렸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세계적으로 활동하겠다는 포부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제가 어려서는 전기가 들어오네 마네 하던 시대였지만 지금은 우리나라 제품이 세계적으로 진출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대 디자이너도 이제는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시작을 했으면 합니다.


글: 송지혜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ong@interpark.com)
사진: 스튜디오 춘(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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