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디자인은,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배우와 연출이 놀 수 있는 놀이터입니다. 그들이 자기 역할을 소화할 수 있도록 집을 마련해 주는 것이죠. 동시에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정서를 잘 표현해 주어야 합니다. 저에게 가장 큰 칭찬은 ‘무대가 좋았어’가 아니라 ‘작품 좋았어’에요. 무대가 작품에 잘 녹아났다는 소리가 가장 큰 칭찬입니다. 무대 디자이너는 디자인 보다 작품에 포커스를 맞추고 작품의 정서가 잘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원래 대학에서 실내디자인을 전공했습니다. 실내 디자인을 더 공부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는데, 밀라노에서 극장의 백스테이지를 우연히 접했어요.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이었는데 망망대해에 혼자 있는 느낌이 들더군요. 전율이 왔어요. 빈 무대가 매혹적이었고, 그곳에 무언가를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좋았어요. 그래서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무대디자인 학교에 다시 입학했습니다. 집에선 난리가 났지만(웃음). 7년을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대학 4년 다니고, 스칼라 극장의 2년 코스 수업을 들었습니다.

창작 뮤지컬 중에서는 <피맛골 연가>를 꼽고 싶습니다. 이 작품은 처음 컨셉트 잡는 것부터 힘들었지만 스탭들이 혼연일체가 돼 같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작품입니다. 2막 남녀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은 안무와 무대가 풀리지 않아 무척 고생했죠. 서로 맞추어가면서 힘들게 완성해서 창작도 이렇게 나올 수 있구나, 생각한 작품이었어요. 그리고 <모차르트!>. 무대가 화려하면 배우 심리를 따라가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가능하면 배우가 잘 보이는 컨셉트로 만들었죠,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무대입니다.



실수를 해서 머리가 하얘진 적이 있어요. <마이페어레이디> 때 도면을 그리고 모두 체크가 된 상황이었는데, 무언가 변경이 되면서 아치 계산을 하지 않았던 겁니다. 세트 셋업을 했는데 잘못된 걸 그때 알았던 거에요. 보통은 어떻게 해야지 바로 답이 나오는데, 그때는 정말 머릿속이 하얘지더군요(웃음). 결국 해결했지만 기억에 남아요.

또 하나는 <피맛골 연가> 하면서 양희경 선생님을 만난 일이에요. 공연 첫 상견례 때 제가 다른 일이 있어서 원피스를 입고 갔는데, 아마 선생님은 ‘저런 애가 무슨 스탭이야’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다음에 무대 모형을 거의 똑같이 만들어 가니 ‘어머머 어떻게 이걸 사람이 만드니’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부터 인사를 반갑게 맞아주시더라고요(웃음). 그게 인연이 돼서 양희은, 양희경 선생님의 <어디만큼 왔니> 무대도 선생님이 같이 하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지금도 선생님과 편하게 연락을 주고 받아요.



작품이 가진 정서, 분위기, 이야기 하고자 하는 걸 최대한 극대화 시켜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적인 작품은 정적으로, 포근한 작품은 포근한 무대가 나와야 해요. 작품을 버리고 디자인을 하는 건 최악이라고 생각해요. 내 성향에 맞든, 맞지 않든 작품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걸 도와줘야 하는 게 무대 디자인입니다.




제작기간에 여유가 있었으면 해요. 물론 제가 처음 한국에 들어와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보단 많이 좋아졌어요. 그땐 공연 2~3개월 전에 대본을 주면서 디자인을 뽑아내라고 한 적도 있었어요. 디자인 나오고 제작소로 넘어가는데 한 달을 잡으면 제작기간이 2주밖에 되지 않는 경우도 있죠. 요즘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이 좋아졌죠. 제작기간이 최소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주어지고 <엘리자벳> 같은 경우는 더 길었어요. 그런데 외국 스탭이든, 우리나라 스탭이든 셋업 일정까지 그들의 시간으로 알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정이 늦어지면 제작에서 부하가 걸리고, 좋은 결과가 나오기 쉽지 않아요. 그리고 극장들이 더 많아지고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최근엔 창작 뮤지컬을 많이 하고 싶어요. 더 힘들지만 보람도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대장금> 할 때 1차 시놉시스부터 보고 스탭들과 토론하고 구성을 해나갔는데, 그 과정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규모에 상관없이 창작을 많이 해보고 싶고, 더 바라자면 우리 작품을 가지고 외국에서 공연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외국도 소재가 많이 고갈됐는데, 우리 걸 개발해서 갈 수 있는 작품이 참 많거든요.
또 하나는 재능기부. 하느님이 주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소외된 지역에서 뭔가를 해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못한다면 나이 들어서라도 꼭 해보고 싶어요.



무대 디자인에 환상을 갖지 말라. 무대 디자인은 자기를 다 내던져서 올인을 해야 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 했듯이 제작과정을 공부해야 하고 거친 현장도 받아들여야 하죠. 그런데 요즘엔 그런 제작과정은 하지 않겠다는 젊은 디자이너들, 학생이 많아요. 난 디자이너인데 왜 이런 걸 해야 해? 이런 생각인 것이죠. 제작소 일 역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인데 디자이너란 이유로 하지 않으려고 하죠.

실무 경험 없이 디자인을 하면 실수가 많아지고 반쪽짜리 디자이너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겨울엔 춥고, 아침부터 밤까지 뛰어다녀야 어떤 재료를 쓸지, 이 경우 어떻게 해야 할 지 감이 생깁니다. 그렇다 보니 살아 남아서 후배가 되는 친구가 지금 없어요. 저희 뒤에 조금 생겼고, 그 뒤로는 뚝 끊긴 것 같습니다. 직업에 대한 환상 보다 자기가 노력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노력하면 좋을 것 같아요.

글: 송지혜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ong@interpark.com)

[ⓒ 플레이DB www.play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