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을 디자인 하는 것 무대를 디자인 하는 사람이겠지만 무엇보다 장면을 디자인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등장 캐릭터에 대한 연민, 이해가 중요해요. 캐릭터가 불행한 순간을 맞이하면 그 불행함을 잘 드러내 주는 공간, 행복한 순간을 살고 있다면 그 행복감을 더 잘 드러내주는 공간을 만들어 줘야 하는 것이겠죠.

그런 면에서 무대 디자인은 생활 보다는 좀 더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드라마는 일상을 편안하게 사는 모양이 아니잖아요. 죽기도 하고 너무나 행복하기도 하고, 그런 부분들을 잘 전달하기 위해 장소와 빛 등이 전체적으로 필요한 것이겠죠. 이런 생각들을 연출가와 공유하고 맞춰나가는 작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 아이스하키 선수셨던 아버님 영향으로 운동신경이 좋았어요. 좋은 대학 가보고 싶은 마음에 서울대 체대로 입시를 치뤘는데 떨어지고(웃음), 당시 어머니께서 여길 들어가면 반도체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며 광운대 전자재료공학과 원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어찌하여 합격해 한 학기를 다녔는데 도저히 못 다니겠더라고요. 수업도 힘들었지만, 20년 후 대기업에서 하얀 가운 입고 반도체 만드는 제 모습이 상상이 안되었어요. 여긴 안되겠다, 마음 먹은 후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차에 CF를 재미있게 봐서 광고를 만들어 보고 싶단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광고 만드는 분들이 한양대 출신이 많으시더라고요. 그래서 한양대 연극영화과 시험을 보고 입학하게 됐습니다. 입학 후 최형인 선생님 연기 수업을 들어보니, 연기에 매력을 느껴 배우가 되어볼까, 생각을 했으나 그런 능력은 없었어요. 하지만 제대 후 연극 워크숍 작업을 할 때 너무나 재미있어서 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연기는 안되니 무엇을 해야 하나, 만드는 것을 좋아하니 무대를 해 보자, 해서 디자인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학교 의류학과를 다니던 아내가 먼저 유학을 갔는데 그 학교 무대 선생님이 너무나 좋으시단 이야기를 듣고 만나 뵈었어요. 저를 편하게 해 주시려고 어찌나 노력하시던지 그 인성에 감명 받아 그 학교를 다니기로 결심했고, 준비해서 본격적으로 무대 디자인 공부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말 이게 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어요. 정말 공부해야 할 게 많고, 무척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한 학기 지날 때마다 내 능력이 달라지는 걸 발견하니 참 즐겁더라고요. 그 때 3년 간 배운 것들이 20년 간 공부한 것 보다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뮤지컬 <남한산성>


그간 만든 무대가 좀 거칠고 어둡죠. 개인적으로 그런 세트를 좋아합니다. 그런 분위기의 작품을 좋아하는 건 캐릭터에 대한 연민을 더욱 느끼기 때문이에요. <갈매기>의 뜨레플레프, <남한산성>의 인조처럼, 뭔가 인간이 무너지는 순간이 저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 같아요. 실제 삶이 그렇다면 굉장히 비극적이겠으나, 어찌되었건 인간이 살면서 그런 감정을 가져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매력적인 것 같고, 그래서 그런 작품을 할 때 감정이입이 더욱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나는 어떤 성향의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다른 분들은 저를 점잖고 이성적이라고들 하시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해요. 굉장히 극단적이고 감정적인 것 같고요.

디자인 할 때 더욱 그렇다는 생각을 합니다. 디자인 과정에서 여러가지 안들이 떠오를 때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 그 최후의 순간에는 아주 극단적이고 감정에 치우치는 쪽으로 가는 것 같아요. 저는 무대디자이너가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믿고 싶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그러지 않으면 너무 재미 없을 것 같습니다.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까지 함께 작업한 연출들과는 굉장히 친해지는 것 같아요. 작업 과정에서 공간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연출적인 접근을 하는 편이거든요. 어떤 연출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기분 나쁠 수도 있겠으나, 저는 장면을 디자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굉장히 광범위하게 작품에 대해 서로 공유를 많이 하게 되는 것이죠.

변덕쟁이 변덕쟁이에요.(웃음) 다혈질이라는 게 아니라, 내면에서 갈등이 많은 거죠.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감정이 치우치는 쪽으로 선택을 해요. 그게 단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스위니 토드> 작품 자체도 정말 좋아했지만, 아드리안 연출과 작업하면서 정말 신났던 것 같아요. 그 당시는 학교 일을 굉장히 열심히 했어야 했던 때였고 반대로 외부 작업을 거의 못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찌 보면 <스위니 토드>가 바깥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뮤지컬 <스위니 토드>
<남한산성> 조광화 연출과 서로 이렇게 생각이 잘 맞을 수 있구나, 서로 이렇게 도움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걸 크게 느꼈던 작품입니다.

<갈매기> 지난 해 서강대 메리홀에서 했던 작품입니다. 오경택 연출도 아주 치밀하고 저와 잘 맞는 연출이에요. 이 때의 경험이 좋아 올해도 역시 함께 세 작품 정도 할 예정입니다.



나의 즐거움과 관객의 즐거움 사이 디자인을 하면서 나는 이런 부분이 너무 좋은데, 어떻게 관객들에게 비춰줄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이 작업이 나 혼자 좋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관객만 좋자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내가 느끼는 이 즐거움을 관객들도 느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을 언제나 하죠. 관객이 느끼는 부분에 내가 좀 더 다가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이 사이의 접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해야 그 길을 찾게 되고, 그 길이 보여야 그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겠지요.



충분한 준비 시간 작품이 안착되어서 보여져야 하는데, 그러기 전에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히 언론에 공개되는 그 순간은 더욱 조악하기 그지 없을 때죠. 언론에서는 보이는 대로 평할 수 밖에 없잖아요. 작품을 위해서 무대 위에서 셋업이나 무대 리허설 등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번 다르고 싶다는 욕심 밖에 없어요. 그게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겠지만 틀에 박힌 대로 기존의 스타일로만 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새 작품과 연출을 만나서 의도적으로 기준도 다르게, 생각도 다르게 해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것이 실험이고 도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 과정들을 통해 ‘아, 할 만한 작품이었다’라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최종 목표는 무대미술가 정승호도 좋지만, 예술가였으면 좋겠어요. 단순히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예술하는 사람으로 평생 살았구나’라고 스스로 느껴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좋게,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 기준이 저마다 있겠지요. 안락한 삶, 풍요로운 삶을 원한다면 연극 작업은 썩 그것을 만족시켜주진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좋은 직업이 아니라고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극 중 인물에 연민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면 이것 만큼 좋은 직업이 어디 있겠어요. 인간에겐 부모가 있고 자식, 가정이 있고, 내 자리가 있고, 그 안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의무감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순간 ‘나는 뭐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내가 될 수 없는 극 중 캐릭터를 이해하고 기대면서 기쁨을 느끼곤 합니다.

그래서 무대 디자인을 하려면 드라마를 잘 이해하고 드라마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자기가 하는 일이 재밌다고 느껴질 겁니다. 재미 없이 일로만 다가오는 건 금방 지치지요. 얼마 전에도 트위터에 ‘내가 연극(뮤지컬)을 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썼어요. (웃음)

또한 예술가라면 정말 감성이 풍부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남들과 달리 바라볼 줄 아는 풍부한 자신만의 시각들이 자양분이 되어 무대 디자이너로서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리: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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