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요. 처음에는 멋있는 공간을 연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죠. 무대 디자이너는 생명체들이 살아 움직이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주는 사람인 것 같아요. 배우·대사·음악 등의 생명체들을 공간과 서로 만나게 해주고, 그 속에서 살아 숨쉬고 움직이게 해 주는 사람인 것 같아요.

무대 디자이너는 집 짓는 건축가와도 같아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보금자리가 있어서 각자 가지만의 스타일에 따라 방을 꾸미잖아요. 무대 디자이너에게는 대본과 연출가가 그 스타일이 되겠죠. 대본과 배우, 연출가에 따라서 무대는 굉장히 달라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작품을 볼 때가 많아요. 한 발짝 떨어져서 배우·연출·스텝이 어떤 사람들인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는 거죠. 저는 배우와 무대가 서로 만나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무대는 그 조화를 만들어주는 가장 큰 베이스라고 생각해요.





표면적으로 얘기한다면, 일단 제가 무대미술을 전공했거든요.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를 다녔는데, 처음엔 무대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한예종의 독특한 입시유형에 끌려서 지원하게 됐어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전공이 많지 않았고, 그 중에서 무대미술과에 끌려서 시험을 봤죠. 그 때는 공연에 전혀 관심도 없었어요. 오로지 겉으로 보여지는 한예종 무대미술과의 모습에 끌렸던 것 같아요. 그 전에는 미술가를 꿈꾸는 미술학도였거든요. 그렇게 갑자기 공연계에 발을 담그게 된 거죠. 가끔은 후회도 해요.(웃음)

그런데 졸업을 하고 학교 밖에 나와보니 제가 배운 것과 현실은 너무나도 다르더라고요. 제가 못하는 것도 많았고요. 회의감이 느껴져 1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한적도 있어요. 그러다가 '나는 나를 표현하고 싶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대 디자인인데 굳이 이걸 왜 버리려고 하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작업을 하게 됐죠. 지금 졸업한지 6년째인데,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새 사람들이 저를 무대 디자이너라고 불러주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아직 스스로를 무대 디자이너라고 의식하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 제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대 디자인이라서 이 작업을 하는 것이지, 다음에는 글을 쓸 수도, 또 다른 것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를 한 영역에만 가두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은 무대 디자이너라는 옷을 입고 있지만 나중에는 또 변할 수도 있겠죠.



작업과정이 남들과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보통은 먼저 텍스트를 분석해서 개념을 잡고, 그 개념에 맞춰서 디자인을 해요. 그런데 저는 텍스트를 읽은 다음에 떠오르는 이미지들, 또는 그 안에 있는 오브제들을 일단 수집해요. 물론 그 수집과정에 제 취향이 반영되죠. 그리고 나서 그것들을 다 모아두고 멀리서 바라봐요. 바라보면서 개념을 잡는 거죠.

저는 '감'을 중요시해요. 대본 혹은 연출가를 만났을 때의 첫인상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고, 그 때의 감을 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어떻게 보면 무대 디자인을 할 때 대본·연출·배우에게 의지하는 편이죠. 무대에서 제 세상을 보여주기보다는 대본·연출·배우의 세상을 제 색깔로 보여주고 싶거든요. 그래서 작업 과정이 보통의 경우에서 뒤바뀔 때가 많아요. 무대 세트가 나온 후에 그걸 수정해가며 작업할 때도 있고, 이미지들만 계속 모아서 배열할 때도 있죠.

어떻게 보면 무대 디자인이란 건 굉장히 모순적인 작업 같아요. 텍스트를 읽고 개념을 만들고, 거기 맞는 이미지에 몰입하는 것은 아주 개인적인 작업이잖아요. 그런데 공연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니까요. 학교에서 디자인을 배울 때는 혼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사실상 자신이 연출가의 역할까지 맡게 돼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달라요. 무대 디자이너가 공연에 합류하게 되면, 먼저 관찰을 해야 해요. 연출가의 의도나 취향도 알아야 하고, 배우들도 관찰해야 하고, 스텝들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아야 되죠. 그렇게 관찰을 하고 나서 작업을 하는 것이 저만의 작업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전 무대가 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경우는 오로지 연출가가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배우가 만들어낸 것이기도 해요. <헤다 가블러>의 무대는 이혜영씨가 만들어낸 거에요. 이혜영이라는 배우가 '헤다'라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 어떤 공간이 나와야 될지 생각하면서 무대를 만들었거든요. 저는 텍스트보다는 무대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들에 초점을 맞춰요. 그래서 가급적 무대에 가짜 진짜 물건들을 두려고 해요. 무대는 판타지가 일어나는 공간이잖아요. 그런데 판타지는 오히려 리얼리티를 갖춰야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짜를 얼마나 리얼하게 만들어 낼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죠.



단점은 제작감독님, 제작소 분들 등 같이 일하는 분들을 힘들게 한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 독거노인이 쓸 장롱이 필요하면, 저는 그런 장롱을 찾아달라고 해요. 도면을 그려서 '이런 장롱을 만들어주세요'하면 편한데, 구해달라고 하거든요. 그럼 제작소에서 굉장히 곤란해 하시죠. 그런데 저는 진짜를 만들지 못할 거면 아예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만약 500년 묵은 바닥이 필요하면, 제작소엔 그걸 만드는 나름의 방법이 있어요. 어떤 색을 칠하고 어떤 질감을 주면 오래 묵은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죠. 그런데 저는 그게 마음이 안 들어요. 차라리 한 번 손댈 것을 수백 번 손을 대서 만들어야 해요. 그게 제 단점 같아요.

장점은 연출,배우분들이 좋아해주신다는 거에요. 배우들이 저한테 '네 무대에 들어오면 무대가 나를 안아주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냥 여기 앉아 있으면 되는구나, 기댈 수 있겠구나 하는 편안한 느낌을 준대요. 연출가분들도 그렇게 말씀하세요. 무대에서 뭔가를 움직이기 편하다고. 저도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말을 여러 번 들었어요.



저는 늘 작품을 할 때 '지금 이 디자인이 최고야' 라고 생각해요(웃음). 그래서 최고의 작품 하나를 꼽기는 힘드네요. 최고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제일 처음 작업했던 <빨래>에 가장 애착이 가요. <빨래>는 제 실험실이었어요. 디자인을 네 다섯 번씩 바꿨거든요. 그 때는 달리 의뢰가 들어오는 작품도 없었고요. 사실 지금 그 무대를 보면 많이 부끄러워요. 그만큼 제가 지난 2년 사이에 많은 작품을 하면서 자란 것 같아요. 그래도 여전히 가장 애착이 가고 기억에 남는 작품인 것 같아요. 그 작품이 제가 지금까지 무대 디자인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됐으니까요.



기억에 남는 일은 안 좋은 일밖에 없네요. 좋은 일은 금방 잊어도 안 좋은 일은 오래 남잖아요.(웃음) 언젠가 모회사의 의뢰로 뮤지컬 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굉장히 놀랐어요. 저는 스스로 아티스트라고 생각하고,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그 회사에서 저를 너무 '업자'처럼 취급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무대를 디자인하면, 그 회사에서는 '요거 하나 빼면 얼마가 되고, 저거 하나 빼면 얼마가 되고…'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해요. 그런데 제 입장에선 무대에서 하나가 빠지면 전체가 다 일그러지기 때문에 아예 새로 작업해야 하거든요.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새로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요거랑 저거만 빼고 그냥 갑시다' 이런 얘기를 들으니 되게 충격적이었어요. 대형 공연기업인데도 이렇게 작업을 하는구나, 그래서 이런 작업밖에 못 하는구나 생각했죠. 내가 앞으로 공연계에서 크려면 이런 관행에 맞춰줘야 한다는 생각에 희의도 느꼈고요. 그 이후에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아예 그 작품을 안 한다고 했어요.




창작자로서 어떻게 하면 무대에 저만의 결을 남길지, 어떻게 제 성향을 보여줄지에 초점을 맞춰요. 사실 공연은 아티스트 개인의 색깔을 보여주기 힘든 구조를 갖고 있어요. 자신의 색깔을 표현하려면 연출가가 되어야 하죠. 디자이너로서는 100% 자기 색을 보여줄 수 없어요. 그래도 어떻게 무대에서 나만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을지를 첫 번째로 생각하죠.



몇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페이지급방식이 좀 더 유연해지면 좋겠어요. 우리는 작품 별로 페이를 받아요. 한 번 페이를 받으면 그 작업기간이 6개월이든 1년이든 쭉 해야 하고요. 그런데 배우들은 연습기간에도 페이를 받잖아요. 그러다 보니 무대 디자이너는 한 번에 여러 작품을 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올해 여러 작품을 맡아서 하고 있는데, 그건 의뢰가 들어와서기도 하지만 일단 먹고 살려면 그렇게 해야 하거든요.(웃음).

또 다른 건 창작자로서의 역할을 존중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무대 디자이너도 한 명의 창작자란 말이죠.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디자이너에게 무슨 '오더'를 내리듯 대하는 분들도 많거든요. 또 작업시간을 좀 더 충분히 줬으면 좋겠어요. 창작이란 게 고민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의뢰하시는 분들은 디자인이 금방 나오는 줄 아나봐요. 시간의 여유를 좀 더 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작품을 의뢰하기 전에 디자이너의 성향을 알고, 작품과 맞는지 생각해보고 나서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무대디자이너에게 의뢰를 했다가 거절당해서 저한테 의뢰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러면 저도 돈을 벌어야 하니까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보다는 제 공연을 보시고, 제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고 나서 선택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창작 뮤지컬 작품을 하나 만나고 싶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부터 뮤지컬을 특히 좋아했어요.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잖아요. 음악도 있고, 춤도 있고 미술도 있고. 그런 점이 뮤지컬의 매력인 것 같아요. 좋은 크리에이브팀과 만나서 첫 무대디자이너로 참여하고 싶어요. 영국에서 <빌리 엘리엇>을 만든 것처럼요.

개인적인 욕심을 말한다면, 무대 디자이너로 그치지 않고 독립적인 형태의 창작자가 되고 싶어요. 제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 그게 연출의 형태도 될 수 있고 전시가 될 수도 있겠죠. 지금은 어떤 단체에 소속됐다는 느낌이 더 강하거든요. 앞으로는 좀 더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서 무대 디자인이라는 영역을 허물고 싶어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제 욕심이죠.



다른 분들께서 이미 많이 해주셨을 테니까, 책을 많이 읽으라는 등의 얘기는 안 하고 싶어요. 후배들을 만나보면, 사실 그들의 얘기는 현실적인 부분이거든요. 졸업 후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며, 어떻게 공연계에 진입을 할 수 있는지가 큰 고민이더라고요.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일단 졸업을 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에요. 다시 신입생으로 돌아가는 자세가 필요해요. 그런데 학생들은 졸업을 하면 뭔가 이뤄질 거라고 기대해요. 그런 건 없거든요.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해요. 그리고 경제적인 부분은 자기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해요.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뭐든 감수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죠.

정말 무대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면, 복사부터 한다고 생각해야 돼요. 저는 어떤 사람도 자기 것은 절대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복사를 한다고 해서 자기가 가진 것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 같아요. 자기가 꿈에 그리던 모습이 되려면, 어디 취직하거나 유명한 선생님 밑에 가서 일을 배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단계를 밟아가야 해요.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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