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고기를 쓱쓱 잘라 입에 성큼 넣는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논스톱 연습을 마치고 8시가 훌쩍 넘어 마주한 주지훈은 피곤한 기색은 얼굴 뒤에 감춰두고 늦은 저녁식사를 전투적으로 해치우면서도 “전 사람을 가리지 않아요. 쓰실 말씀이 20%도 안될 수도 있어요. 제가 워낙 솔직하거든요.”하며 씽긋 웃으며 노크도 없이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훌쩍 넘어선다. 프로, 집중, 그리고 사람, 아, 주지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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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재미있다, 그런데 패닉상태다.

격동의 혁명기를 온 몸으로 부딪히는 의사이자 시인, 사랑의 회오리에 빠져들고 또 고통 받는 유리 지바고의 삶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광활한 배경만큼 그 넓이와 깊이를 모두 담아내야 하는 역할에 주지훈이 선다. 막이 오르기 한 달여 전. “수채화 같던 인상은 사라졌다”며 운을 뗀 그는 어떤 그림으로 <닥터 지바고>를 그려내는 중일까.

“기자간담회 할 당시에는 음악 연습만 하고 있었을 때죠. 그래서 어떤 작품일까 좀 걱정스럽기도 했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고, 아주 재밌어요. 하지만 이런 작품일거라는 상상은 전혀 못했죠. 말 그대로 흥미진진해요. 느낌들, 감정들이 굉장히 많고 볼거리도 대단해서 사람들이 집중하게 만들어주죠. 대본만 봤을 때는 수채화 같았는데 막상 그 안에 들어가니 조금 더 진해지고 더 확실해졌어요.”

수채화가 어느새 유화로 바뀌어가고 있다. 물감이 덧칠해질수록 무대는 짙고 묵직하게 발색한다.

“시작할 때 잡은 캐릭터에서 아예 새로 만들고 있어요. 캐릭터들이 무대 위에서 주저하고 생각할 틈이 없을 정도로 빨라졌어요. 처음에 받은 느낌과 달라 혼란인거죠. 오늘도 거의 전체 런을 돌았는데 느낌 상으로 2, 30분 밖에 안 되는 것 같이 빠르고 확실히 재밌어요.”


물감 뿐 아니라 어느 붓을 선택하고 어떻게 빈 캔버스에 터치를 하는가도 중요하다. 뮤지컬 데뷔작인 <돈 주앙>에 이어 영어 대본이 먼저인 작품을 하는 고충은 그 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들의 고민이며 나름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우리네의 사고로 우리 말로 접근해 국내 관객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는 동사가 먼저 나오고 한글에선 뒤로 가죠. 그런 언어 구조가 달라서 장면 속에서 대사를 풀기가 매번 적응이 쉽지 않아요. 따라가야 하는 틀이 있지만, 배우들은 기본적으로 크리에이티브 한 사람들이라 이런 부분은 힘들어하죠.”

깊게 감고 떴다. 마음이 열렸다.

2009년 뮤지컬 <돈 주앙>에 서며 공연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하는 그가 군 제대 후 복귀작으로 뮤지컬을 택한 건 의외의 선택은 아닌 듯 하다. “정말 공연을 많이 보러 다닌다”는 그의 말은 자주 들려오는 공연장 출몰 제보들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또 군 복무 중 <생명의 항해>를 통해 전국투어 공연을 한 터이기도 하다.

“다른 군 공연은 군대 행사니까 군인의 모습으로 올라가잖아요. 그런데 <생명의 항해>는 일반인들에게 표도 팔고, 하나의 작품으로, 정말 배우로 올라갔어요. 공연 끝나고 머리를 다시 짧게 자르고, 5개월만에 군복을 마주했을 때 그 기분은.(웃음) 그치만 군 생활은 나름 잘 했어요. 살이 81kg까지 쪄서 잘 아는 사람들이 돼지 같다고(웃음). 제대 앞두고 운동 열심히 했죠.”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자들의 베스트 악몽인 ‘입영통지서 다시 받는 꿈’을 벌써 네 번이나 꿨다는 평범한 남자이지만, 모델로, 배우로 살아온 유명인 주지훈으로서는 오히려 군 생활이 특별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평범한 일상을 사는 시간이 되지도 않았을까.


“전 자유를 안 느끼고 살아본 적이 없어요. 모델들이 이기적인 게 아니라 개인적인 면이 있거든요. 영화도 혼자 잘 보러 다니고. 그런데 주변에서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위험하다고들 하셨는데 뭐가 위험할까. 초반에는 저도 헛갈렸죠. 하지 말아야 하나, 싶고. 보통 유명해지면 친구들이 대접을 해주거나 하는데, 제 친구들은 어릴 때 친구라, 전혀 대접 같은 것도 없고, 불러서 나가보면 남자들끼리 ‘궁’ 대화 외우면서 저 약올리고. 그 친구들 덕에 그런 특별한 생각들이 안 생겼을 수도 있어요. 길 가다 절 알아보시면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그러는거죠.”

하지만 그는 “마음이 좀 더 열리게 된 것 같다”고, “조금씩 무뎌지는데, 그래서 좀 무섭다”고 자신을 바라본다.

“이런 저런 일이 많았잖아요. 안 좋은 일 말고도 개인사들도 많았고. 배우로서 좋은 지 나쁜 지 모르겠지만, 점점 큰 일이 없어져요. 그래서 좀 무서워요. 기자회견장에서 ‘눈 한번 감았다 떴더니 3년이 흘렀다’고 했지만, 굉장히 어둡고 깊게 오랜 시간 감았다 떴죠.”

제대 후 가진 팬미팅 자리에서 그룹 ‘스미스’의 보컬로 등장해 화제가 되었다. “스미스라는 이름에 그냥 꽂혔다”는 그는, 그저 단지 ‘그냥’ 세 음절에 사로잡힌 건 아닌 듯 하다.

“스미스가 가진 뜻 중에 대장장이가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만화책에 대장장이가 등장해요. 누군가가 왜 이 일을 하냐고 묻자 그 대장장이가 내가 이걸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정신을 차려보니 망치를 두드리고 있었고, 불꽃이 튀어나가는 것에서 생명을 느낀다고 대답하거든요. 불꽃이 일었다가 없어졌다가. 저는 어쨌든 여러 경험들이 있어서 가졌다가 잃었다가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타입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예전보다 앞만 보고 뛰는 시간도 줄었고 한 곳에 머무는 시간도 없어진 반면에 걷는 시간이 많아졌지요.”

걸어가자, 나는 계속 할 사람이니까.

지금, 주지훈의 길 위엔 배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인간 주지훈이 아닌 “캐릭터로 보여지고 싶다”는 간결하고 간절한 소망이 진심으로 우러나온다.

“사람은 무슨 일이든 겪을 시기에 겪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한꺼번에 몰려와요. 제가 팔자가 그런 것 같아요. 모델 데뷔도, 드라마나 영화 데뷔도 그렇고. 처음부터 주인공을 맡는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만, 견딜 수 없는 데미지가 와요. 누군가가 “이상하게 사람들이 너에게는 잣대가 엄격하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하는 게 보이던 아이가 85점을 맞으면 안타깝다, 괜찮다, 고 하지만 그런 모습을 못 본 사람이, 그것도 분위기가 놀 것 같은 애가 딱 나타나서 8,90점을 맞으면 일단 컨닝 했냐고 의심하고 추궁하죠.


어떤 직업군이든 단계가 있고 그게 노출이 되면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는데 저는 그런 게 없는 거에요. 유명한 모델 학원 출신도 아니었고,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뭔가 정보가 없는 거죠. 그래서 늘 탑과 비교하시곤 하세요. 저도 오디션을 200번 이상 봤어요. 드라마 ‘봄의 왈츠’ 오디션에선 5천 대 1 경쟁률에서 남자 1등을 했죠. 그런데 다들 모르시니까 갑자기 나타난 줄 아시는 것 같아요.”

엄격한, 날카로운 잣대는 그에게 대범함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굳은 살이 두껍게 박힌 손은 뜨거운 그릇을 잡아도 그저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이.

“그래서 위험 감지 센서 기준이 너무 높아요. 남들이 볼 때 위험한데 제게는 보통인 거죠. <돈 주앙> 할 때 주변에서 다들 놀랐는데, 저는 배우가 연기를 한다는데 왜 놀라지? 했어요. 첫 무대가 대극장이었기 때문에 제겐 그게 보통으로 인식이 되는 식이에요. 이번에도 노래에 대해 많이 물어보시는데, 전 싱어가 아니라 액터라고 말씀드렸어요. 접근 방식이 다른 것이죠. 그렇다고 제가 노래 연습 안 하는 건 아니잖아요.”

영화, 드라마, 무대. 장르에 대한 구분은 그에게 없다.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라는 너무나 의외의 답변이 되돌아 온다.

“제가 하는 일에는 의지가 강한데 그 밖에 대부분에는 약해요. 그래서 몇 개만 하고 있지만, 그러다보니 나쁘게 외곬으로 빠질 것 같더라고요. 영화배우, 뮤지컬 배우 등 어느 한 타이틀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요. 저는 배우에 대한 특권 의식이 없어요.

그저 개인 생각이지만, 배우는 하나의 직업군이잖아요. 이런 제 생각을 알리려면 더 홍보해야 하고 쇼 프로그램에 나가기도 해야 하는데 그게 아직은 싫으니까 혼자 고민하고 싸우는 거에요. 능력이 되는 분들은 캐릭터에 충실하고 또 다른 활동도 다 하실 수 있겠지만 저는 아직 그 능력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맡은 캐릭터와 그 감정에 충실하다보니, 좋은 연기와 좋은 사람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요즘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배우 주지훈의 고민이 쉽게 해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에 조바심 내지 않는다. “지금 당장 해결될 수는 없지"라는 전제에 “계속 고민해서 언젠가는 꼭 찾아낼 것이다”라는 다짐이 더해진다. 최정상의 모델에서, 드라마, 영화, 뮤지컬을 넘나드는 배우로 험한 길을 힘들다 여기지 못하고 걸어온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영화, 드라마의 이점과 무대의 이점을 접목시키고 싶고, 그럴 수 있다는 걸 저는 믿어요. 명동 한복판 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느 한 사람이 슬프게 앉아 있으면 가까이 가지 않아도 다 알아요. 제대로 하면 다 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접목 시키고 싶은데 아, 어려워요, 힘들어요. 당장 찾기는 힘들다 해도 의미 없는 고민은 아닌 것 같아요. 전 계속 극작업을 할 거니까 언젠가는 찾아질 것 같아요. 소극장 무대도 너무나 기대 되요. 사람을 바꾸는 건 큰 일이 아니에요. 작은 것이 쌓여서 성향이 되듯,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그것들이 쌓여서 절 지탱하겠죠. 그 결과의 모습들이 어느 순간 나올거에요.”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이민옥(okjassi@daum.net), 디자인: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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