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걸쳐 일본에선 ‘합스부르크 제국 붐’이 뜨거웠다. 진원지는 오스트리아산 뮤지컬 <엘리자벳>. 1996년 여성들만 출연하는 다카라즈카 버전으로 처음 소개돼 폭발적인 인기를 끈 뒤 2001년 토호에서 원작대로 다시 공연되면서 일본 여성들 사이에 유럽 최고 명문가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 이후 일본에서는 오스트리아 관광이 유행하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관련된 각종 책이 출간돼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뮤지컬 <모차르트> <댄스 오브 뱀파이어> <루돌프-더 라스트 키스> <레베카> <마리 앙투와네트> 등이 잇따라 공연되며 영미 뮤지컬과 차별되는 ‘비엔나 뮤지컬’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한국에서도 <모차르트>와 <엘리자벳>의 성공을 바탕으로 비엔나 뮤지컬이 막 궤도에 오른 모습이다. 오는 11월 무대에 오를 <황태자 루돌프>를 비롯해 <레베카> <마리 앙투와네트> 등도 차례차례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비엔나 뮤지컬의 인기가 일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 주목된다. 최근 김준수가 출연한 <모차르트>와 <엘리자벳>을 보러 온 일본 관객이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양국의 작품을 비교하게 된 것이다. 같은 작품이라도 연출이 다르고 해당 프러덕션만을 위한 곡이 새롭게 추가되는 등 흥미로운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 뮤지컬 관계자들과 팬들 역시 일본에서 공연되는 비엔나 뮤지컬에 관심이 많다. 일본이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엘리자벳>의 공연이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마리 앙투와네트> 제작을 주도하는 등 비엔나 뮤지컬의 세계화에 기여한 일등공신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에서 비엔나 뮤지컬의 제작사인 토호(東寶)가 최근 한국에서 비엔나 뮤지컬이 공연될 수 있도록 중개 역할을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오는 11월 한국에서 <황태자 루돌프>의 공연이 예정된 가운데 지난 7월 한달간 일본 도쿄 제국극장에서 <루돌프-더 라스트 키스>가 공연됐다. <황태자 루돌프>에 대한 기대가 워낙 큰 만큼 한국의 뮤지컬 관계자와 팬들이 직접 관람하러 오기도 했다.

참고로 두 작품은 제목이 다소 다르지만 같은 작품이다. 국내에 <지킬 앤 하이드>로 잘 알려진 프랭크 와일드혼 사단이 만든 것으로 2005년 워크숍 단계에선 <메이얼링 어페어와 루돌프-더 라스트 키스>란 제목이었다.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사건이 유럽과 미국에선 ‘메이얼링 어페어(메이얼링 정사)’로 잘 알려져 있는데다 이 제목을 딴 영화나 드라마, 발레 등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06년 헝가리 초연을 앞두고 뮤지컬의 제목은 ‘루돌프’로 결정됐고, 이후 유럽 공연에서는 이 제목을 달고 있다. 토호가 2008년 초연할 때 ‘루돌프-마지막 키스’로 제목을 단 이후 그 제목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 제작사인 EMK뮤지컬컴퍼니는 ‘루돌프’란 원래 제목을 붙이려고 했으나 일반 관객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를 잘 모른다는 점을 감안해 ‘황태자 루돌프’로 달기로 했다.

뮤지컬 <루돌프>는 <엘리자벳>에도 나오는 시시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자유주의 성향의 루돌프 황태자는 황실의 변화를 추구하지만 보수적인 아버지에 부딪혀 번번이 좌절당한다. ‘줄리어스 팰릭스’라는 이름으로 신문에 자유주의 사설을 기고하던 그는 가난하지만 이상을 추구하는 소녀 마리 베체라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이후 정략결혼한 황태자비와 헤어지고 마리와의 결혼을 꿈꾸지만 황제의 거센 반대로 무산된다. 그리고 황제의 오른팔로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타페 수상이 그의 사랑을 이용해 함정에 빠뜨리자 마리와 함께 죽음을 택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이어받을 황태자가 연인과 동반자살한 메이얼링 사건은 20세기 초반 전세계를 뒤흔들었다. 루돌프의 사후 사촌동생인 프란츠 페르디난드가 황태자가 되었는데, 황제처럼 보수 성향이었던 그는 제국 내 각지의 민족주의를 탄압하다가 1914년 사라예보에서 암살됐다. 이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루돌프가 죽지 않고 황제가 됐더라면 자유주의 정책을 펼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루돌프의 이런 드라마틱한 삶을 소재로 한 소설, 영화, 드라마, 발레 등이 여러 편 만들어졌다.

그런데, 198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지타 황후가 남편의 유언에 따라 루돌프가 자살이 아니라 암살됐다고 발표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당시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암살됐다고 말했지만 범인을 확실히 밝히지 않은 탓에 아직도 수많은 음모론이 떠돌고 있다. 뮤지컬 <루돌프>는 메이얼링 사건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 즉 정치적 암살이 아닌 낭만적 자살이라는 면에서 다뤄지고 있지만 타페 수상이 헝가리 독립을 지지하는 루돌프를 궁지에 밀어넣어 자살에 이르렀다고 묘사했다.

그런데, <루돌프>는 비엔나 뮤지컬 중에서도 다소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뮤지컬협회,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오페라극장과 세게드 야외페스티벌이 공동제작한 이 작품은 뉴욕 브로드웨이의 프랭크 와일드혼 사단이 참여한 것이 특징이다. 국내에 <지킬 앤 하이드>로 잘 알려진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을 맡았고, 극작가 겸 작사가인 잭 머피와 피비 황 그리고 낸 나이튼이 대본과 가사를 맡았다.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미하일 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 콤비가 <엘리자벳> <모차르트>를 잇따라 성공시킨 후 비엔나극장협회는 독일어권 아티스트와 영미권 아티스트의 조합을 통해 새로운 뮤지컬 제작에 나섰다. <댄스 오브 뱀파이어> <바바렐라> <황태자 루돌프> 등이 바로 바로 영미권 아티스트가 참여한 작품이다. 와일드혼의 경우 <지킬 앤 하이드>를 비롯해 <스칼렛 핌퍼넬> <남북전쟁> 등 시대극에서 장중한 음악을 선보여왔기 때문에 영미권 스타일에 유럽적인 정서를 잘 담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루돌프>는 2005년 뉴욕에서 대본 리딩을 거친 뒤 이듬해 부다페스트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코엔 슈츠 연출로 초연됐다. 이후 겨울엔 부다페스트에서, 여름엔 세게드에서 번갈아가며 공연됐으며 2008년 일본 도쿄, 2009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공연됐다.

2008년 일본 초연은 아시아 연출가로는 처음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손드하임의 <태평양 서곡>으로 토니상 후보에 오른 미야모토 아몬이 연출을 맡았다. 아몬은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와일드혼과 비엔나뮤지컬협회의 허락을 받아 원작에 없던 길거리의 인형사를 만들어 나레이터 역할을 맡기고 오케스트레이션을 바꾸는 등 상당히 손질을 가했다.

지난 7월 도쿄 제국극장에서 공연된 <루돌프-더 라스트 키스>는 2008년 아몬이 연출한 버전이 아니라 2009년 비엔나에서 데이빗 루보가 연출한 버전이다. 영국 출신으로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를 오가며 연극과 뮤지컬을 연출하고 있는 그는 2007년 뮤지컬 <시라노 드 베르주락>을 통해 와일드혼 사단과 인연을 맺었고 2009년 <루돌프>에 비엔나 초연에도 함께 했다. 1990년대 도쿄에서 일본 연출가, 배우, 디자이너 등과 함께 ‘Theatre Project Tokyo'라는 극단을 만들어 활동한 바 있는 그는 이 작품에서 가부키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을 무대에 표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루돌프-더 라스트 키스>의 경우 막이 열리면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벨벳의 상자 안에 들어있는 듯한 무대가 보인다. 왕실의 답답한 분위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붉은 색 커튼이 회전무대와 함께 돌면서 장면 전환이 빠르게 이뤄지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회전무대는 서양에서는 15세기 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처음 고안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극장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된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18세기에 이미 가부키 전용극장들이 회전무대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를 활용한 가부키 연출이 일반적이었다. <루돌프-더 라스트 키스>에서 무대의 강렬한 색채감이나 회전무대를 이용한 장면전환은 가부키의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작품은 회전무대의 적극적인 사용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화려한 것은 아니다. 루돌프 황태자와 마리가 스케이트를 타며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이나 자유주의자들이 즐겨 찾는 술집 등의 장면을 보면 기본적으로 심플하다. 다만 이런 세트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주인공들의 관계성이나 드라마의 전개를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루보가 연출한 새 버전은 아몬이 연출한 옛 버전보다 호평을 받고 있다. 아몬 버전의 경우 당시 새롭게 만든 나레이터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이번엔 그런 역할 없이도 작품의 전개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인공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

출연진으로는 ‘일본 뮤지컬계의 조승우’라고 할 수 있는 이노우에 요시오가 루돌프 황태자 역할을 맡았고, 다카라즈카 가극단 출신의 카즈네 미오가 마리를 연기했다. 또 시키 출신의 요시자와 리에, 사카모토 겐지 등 중량감 있는 뮤지컬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명실공히 일본 뮤지컬계의 최고 스타인 이노우에는 도쿄예술대학 성악과 출신으로 대학생이던 2001년 토호 버전 <엘리자벳>의 루돌프 역으로 데뷔했다. 성악 전공자답게 가창력이 뛰어난데다 무대 위 존재감이 뛰어나 데뷔하자마자 스타로 떠올랐다. 이노우에는 한국 뮤지컬 배우들의 폭발적인 샤우팅 창법은 아니지만 일본 뮤지컬 배우들에게 자주 보이는 엔카 창법을 구사하지 않는다. 시키와 함께 일본의 양대 뮤지컬 제작사인 토호가 제작하는 작품에서는 늘 캐스팅 1순위에 꼽히며 아몬 버전의 <루돌프-더 라스트 키스>에서도 타이틀롤을 맡은 바 있다.

한국에서 선보일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는 일본에서 이번에 공연된 비엔나 버전과 여러 부분에서 다를 전망이다. 한국판 <엘리자벳>을 연출한 로버트 요한슨 등 스태프들이 원작자들과 논의한 끝에 캐릭터를 수정하고 극을 재구성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무대와 의상 디자인을 선보일 예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작곡가 와일드혼은 한국 버전만을 위해 새로운 뮤지컬 넘버 하나를 더 만들기도 했다. 박은태, 류정한, 민영기 등 몇몇 배우들이 캐스팅됐다는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아직 전체 캐스팅이 발표되지 않은 상태다. <모차르트> <엘리자벳> 등 비엔나 뮤지컬의 한국 정착에 큰 기여를 한 김준수의 출연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등 이 작품이 올 하반기 최고 화제작이 될 것은 분명하다.

글/ 장지영(국민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