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국민가수 에디뜨 피아프(Edith Piaf)와 그녀를 연기하는 엘레나 로저(Elena Roger). 에디뜨 피아프의 일생을 그린 연극 <피아프>에는 열정과 아련한 쓸쓸함이 가슴 가득한 두 여인이 있다.

비극적 삶을 노래하는 그녀, 피아프

불어로 ‘작은 참새(La Mome Piaf)’에서 따온 이름 피아프는, 길거리 가수였던 그녀를 발탁한 카바레 사장 루이 르플레(Louis Leplee)에 의해 지어졌다. 왜소한 체구만으로는 짐작하기도 어려운 그녀의 비극적 삶은,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는 교양 있고 우아한 파리 여가수의 모습이 아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의 보살핌 없이 매음굴에서 자랐고,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삶을 지탱해야 했으며, 사랑에 항상 목말라 하면서도 영원한 사랑을 찾지 못해 괴로워 하는 슬픈 영혼이었다.

신이 그녀에게 준 유일한 재능은 노래였다. 노래는 삶을 표현하는 방식이었고, 그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녀의 삶이 굴곡질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청중들에게 깊이 있고 호소력 있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사랑이야말로 그녀를 노래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기에, 사랑은 그녀의 삶과 노래에 유일한 주제였다. 모든 것이 사랑의 갈망에서 비롯되었기에 그만큼 주위엔 남자들이 많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버려질 것을 두려워해 자주 사랑을 떠났고, 다시 다른 사랑을 찾곤 했다. 그녀가 발굴해 내었던 이브 몽땅(Yves Montand)이나 조르쥬 무스타키(Georges Moustaki)가 그랬고 두 번의 결혼과 이별이 그랬다.

미들급 세계 챔피언인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과의 뜨겁고 진실했던 사랑은 그녀가 추구했던 행복한 삶의 원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갑작스런 비행기 사고로 인한 마르셀의 죽음은 그녀의 과거가 그랬듯이 그녀의 미래도 행복할 수 없음을 예감케 하는 것이었다. 그가 죽고 그를 위해 쓴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는 그만큼 피아프의 애절한 진심이 담겨있다.

피아프의 개인적인 삶은 그녀가 가수로서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피폐해져 갔다.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더욱 비극으로 몰아갔고, 술은 삶의 일부가 되었으며, 교통사고 이후 약물 중독과 간암으로 그녀의 빛 바랜 47년의 장밋빛 인생은 많은 팬들의 아쉬움만 남기며 마감될 수 밖에 없었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여인, 엘레나 로저

엘레나 로저(Elena Roger)는 단순히 피아프를 모방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극이 종반으로 치달을수록, 그녀를 위해 피아프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의심했을 정도로, 그녀는 피아프였고 피아프는 그녀였다. 인터미션 없는 100분의 공연시간 중 대부분의 장면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만큼 극이 피아프라는 역할에 요구하는 몫은 평범한 배우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큰 부담일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녀 몫 이상을 해내는 모습이다.
그녀는 빠르게 전환되는 여가수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때로는 온몸으로 표현해 내었다. 사랑을 갈구하는 불운한 여인은 그녀의 눈빛에, 노래에 대한 열정은 몸짓과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극의 불연속성이나 구조적 문제점들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연기에는 후한 평가를 주었다는 사실에서, 뛰어난 연기자의 재능으로 대본 자체의 결점이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다는 예를 본 것만 같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신의 뮤지컬 베우이자 댄서였던 엘레나 로저는 아르헨티나에서 배우의 꿈을 믿고 단신으로 런던으로 온 용기 있는 여인이다. 돈마 웨어하우스(Donmar Warehouse)의 예술 감독 마이클 그랑디지(Michael Grandage)는 그가 연출했던 2006년 런던 리바이벌 <에비타, Evita>에서, 아르헨티나에서 런던으로 오디션을 보러 온 그녀를 주인공으로 발탁하는 모험을 한 것이다.

그녀에게도 <에비타>는 커다란 도전이었다. 초연에서 에바 페론 역을 맡았던 일레인 페이지(Elaine Paige)가 아직 건재한 런던이었으며(우연인가, 운명이었을까. 일레인 페이지는 1993년 웨스트 엔드에서 피아프를 연기해 이미 엘레나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듯 했다), 이제는 로이드 웨버를 비롯한 런던이 그녀를 지켜보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평론가들의 호평과 함께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기에 이른다.

그녀의 피아프는 2007년 영화 <라 비 앙 로즈, La Vie En Rose>에서의 피아프역을 통해 오스카 여우 주연상을 받은 마리옹 꼬티아르(Marion Cotillard)와는 달랐다. 아르헨티나의 여배우는 조금 더 자신만의 피아프가 되고자 했다. 역할을 맡기 전까지는 한마디의 프랑스어도 구사하지 못했던 그녀였지만, 열정과 끊임없는 도전은 소통의 벽을 허물기에 충분했다.

돈마의 끝없는 자기 도전

영국 극작가 팸 젬스(Pam Gems)의 78년 대본을 재구성하여 만든 이번 공연은 돈마 웨어하우스의 연출가 제이미 로이드(Jamie Lloyd)의 감각적인 이미지 구성을 바탕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번 여름 웨스트엔드에 많은 이슈를 몰고 다녔던 돈마 웨어하우스는 이번 공연에도 일찌감치 표를 매진시키며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고, 시즌이 끝난 직후 공연은 690석의 보드빌 극장(Vaudeville Theatre)로 이전되어 10월 16일부터 14주의 연장공연을 시작하였다.

런던의 다른 연극 작품들이 여러 외부상황 때문에 막을 일찍 내리거나 객석이 많이 빈 채로 공연이 진행되고 있는 요즘 <피아프> 만큼은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돈마 웨스트엔드 시리즈를 비롯한 <피아프>의 성공적인 모습은 연극의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우려하는 여러 비관적인 시각의 전문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이처럼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작품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모습은 웨스트엔드만이 가지는 저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피아프가 생전에 활동하는 모습을 보진 못했으나, 피아프 만큼 열정을 가진 남미의 여배우에게서 20세기 위대했던 여가수를 엿볼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리라. 이제 한 여인은 그녀가 불렀던 노래들만이 전설이 되어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다른 한 여인은 그녀가 꿈꿔왔던 미래의 모습에 한 발 더 다가서고 있다. 그리고 두 여인은 함께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 ‘Non, Je Ne Regrette Rien (아니,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