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에비타’는 ‘에바’를 위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존인물인 ‘에바 페론’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은 두 남자, ‘체 게바라’와 ‘후안 페론’과의 긴장감이 더해져 주인공 ‘에바’를 더욱 입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드러낸다. 극장을 나선 후에도 관객의 귓가에는 ‘에바’의 노래가 한동안 떠나지 않는다. 자신의 조국을 향해 ‘날 위해 울지 말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그녀가 죽은 지금에도 여전히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잘것없었던 한 여자를 이곳에 있게 해준 건
여러분 사랑이란 걸”

작품의 주인공 ‘에바’는 아르헨티나 한 시골의 가난한 사생아로 태어나 아르헨티나 퍼스트레이디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여인이다. 꿈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야심 찬 여인의 일대기는 작품에 끊임없이 흐르는 탱고의 선율처럼 화려하고 또한 격정적이다. 

작품에서 ‘에바’는 성공을 위해 남자를 서슴없이 이용하는 요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최종적으로 선택한 남자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도 그녀의 힘이다. ‘에바’는 내세울 것 없는 서민 출신으로 여성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 신뢰와 인기를 얻게 된 기반은 오히려 그녀의 출신이 비천한 데 있었다. 국민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의 출신을 이용하고 스스로를 국민의 대변인으로 자처하는 ‘에바’의 대범한 설득력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녀에 대한 평가를 속단하기 힘들게 했다.

‘에바’를 연기한 정선아는 무대 위에서 다채로운 변신으로 관객을 매혹시켰다. 때로는 요부처럼 남자를 홀리고, 때로는 성녀처럼 국민 앞에 섰으며, 남편인 후안 페론보다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우뚝 서기도 했다. 대사 없이 노래로만 연기하는 무대에서 압도적인 비중과 존재감을 드러내는 정선아의 활약은 ‘에바’가 살아 있을 당시 그녀의 영향력을 실감케 했다.  

“그 약속 꼭 해낼게요
고난이 와도 시련이 와도 믿어준 당신 잊지 않아요”

빛나는 조명 아래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가 눈부시다. 자신의 조국과 자신을 사랑하는 국민을 향해 슬퍼 말라고 노래하는 ‘에바’의 모습은 한때 프랑스 백성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가 혁명의 심판대에서 이슬처럼 사라진 마리 앙투와네트 왕비를 떠올리게 한다.

세상 물정 모르고 처음부터 끝까지 우아한 귀족의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는 왕비와 삼류 배우 출신으로 자신의 남자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스스로 퍼스트레이디의 자리에 올랐던 ‘에바’는 닮은 듯 대조적이다. 국모의 자리에서 사랑받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비난받기도 했다는 점이 닮았지만 다른 점은 둘의 극명한 출신 차이다. ‘에바’는 서민 출신에서 혁명적 상승을 이룬 야심가이고, 앙투와네트는 태생이 고귀해 서민과 정서적으로 교감하지 못했던 고고한 귀족이었다.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국민의 진심을 알지도 자신의 진심을 전할 수도 없었던 앙투와네트와는 반대로 ‘에바’는 국민의 가까이서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를 향해 ‘체 게바라’는 차가운 목소리로 포퓰리즘에 젖어 인기에 영합하는 일개 스타일 뿐이라고 조소한다.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가까이 자신을 낮추고 아르헨티나를 맡겨달라고 진심을 던진 ‘에바’의 운명이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이어진 것도 그녀의 변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무대 위 어디에도 그녀의 죽음을 그녀의 행동이나 평가와 연관 지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단지 화려했던 퍼스트레이디의 허망한 죽음이 가로 놓이면 그 위로 쏟아지는 조명이 소리 없이 그것을 지켜볼 뿐이다. 담담해서 더욱 지켜보기 슬픈 죽음의 연출은 그녀의 일생을 평가하기 이전에 애달픈 여운으로 관객의 가슴을 울린다.

‘에바’를 단순히 신분상승에 성공한 야심가로 볼 수 없는 것은 그녀의 욕망이 지극히 서민적인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는 미움이나 애정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서민과 그 심정을 가까이했던 퍼스트레이디는 성녀적 면모도 악녀적 면모도 모두 가지고 살아가는 서민의 불완전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에바’는 자신의 힘과 생명력이 대중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다분히 정치적인 여인이었다. 누군가의 대표가 된다는 것이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족이 돼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성공과 힘이 누군가에게서 강탈한 것이 아니라, 결국 국민 스스로가 위탁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녀가 아직도 비판 속에서도 대중의 마음속에 건재한 이유일 것이다.

작품이 ‘에바’의 일대기를 담은 만큼 ‘에바’의 표정과 몸짓, 목소리가 극의 전반을 주도한다. 작품은 결코 인물 개인을 정치적인 평가로 재해석하지도, 깊은 책임을 묻지도 않는다. 그래서 ‘에바’의 노래들은 더욱 슬프고 호소력 있는 울림으로 관객에게 남는다. 장면의 전환에서 화려한 연출 없이 담담하게 돌아가는 회전무대도 주목할 만하다. 계단을 휘돌아 올라가는 ‘에바’의 얼굴 위를 비추는 조명이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음영을 만들어낸다.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