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의 무대를 본 관객에게 여주인공 안나가 남기는 잔상은 깊다. 세 명의 배우는 안나의 깊은 상처와 반전과도 같은 마지막 결심, 그 안의 감정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세 배우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이해하고 있는 각자의 안나는 어떤 모습인지, 작품과 배역, 연기 등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연습실에서 런쓰루를 보고 난 이후에 마지막 대사와 표정이 계속 오버랩되면서 따뜻한 감정이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을 치유극으로 생각할 때 안나가 가진 치유의 힘은 무엇일까요.

송상은: 저는 그래서 마지막에는 조금 웃으려고 해요. ‘동의합니다’를 말할 때도 그렇고, 커튼콜에서도 그렇고요. 그때라도 좀 배우도 숨통을 트고, 관객분들도 트이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이제는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웃어 보이려고 해요.

임강희: 제가 봐도 상은이는 마지막에 많이 웃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해야 하는데 아직은  복받치는 감정들을 더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뭔가 치유가 되려면 안나를 하는 배우가 좀 더 담담하게 털어내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니까요. 이 부분이 아직 힘든 건 제 개인적인 성향인지도 몰라요. 상은이가 잘 빠져나오는 스타일이라면 저는 한번 빠지면 푹 빠져서 헤어 나오기 힘든 스타일이거든요. 운선이가 저한테 첫공을 보고 해줬던 얘기도 ‘동의합니다’를 할 때 좀 더 담담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저는 아직까진 아프고, 지금 당장은 털어낼 수 없지만 털어내려고 노력하겠다는 의미로 그 대사를 하고 있어요. 관객들도 치유극으로서 치유를 받고 돌아가시려면 특히 안나가 중요한 것 같아요. 안나한테 가장 아픔과 충격을 받으시니까요. 제가 많은 것들을 비워내기 위해 더 노력하려고요.

정운선: 연출님도 말씀해 주신 건데요. ‘당당히 직면해야 한다’는 그 부분에 초점을 두고 있어요. 안나가 기억을 잃었을 때는 상처보다 사건 그 자체와 메리에 대한 것에 시달리죠. 하지만 진정한 현실을 알게 된 이후엔 안나 스스로가 담담하게 맞서고 직면해야 해요. 그것 때문에 그녀가 아파하든 끌어안든 행복해하든 감사해하든 그건 다음 문제 같아요.

그리고 안나가 형제 중에 유일한 여자잖아요. 물론 따로 입양돼서 한 부모 간의 친형제는 아니지만요. 때로는 엄마 같고, 때로는 동생 같고, 누나 같으면서 여자들만이 할 수 있는 ‘품을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요. 극을 끌고 가는 것은 한스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안나가 다 품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장 데미지가 큰 것도 안나이고, 전체를 끌어안으면서 한 인간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안나고요. 지금도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연습하고 있어요.

임강희: 연출님이 저희한테 하셨던 이야기도 한스와 헤르만이 극을 끌고가지만 안나가 조용하게 다른 세 명을 품어주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여자로서 안나는 분명하게 보이진 않아도 끌어안는 힘과 품이 있어야겠죠.

관객들이 헤르만과 안나의 관계에도 궁금하다는 반응인데요. 극 중 의미심장해 보이는 듀엣신도 있고요. 친형제가 아닌 둘은 남녀간 애정구도인가요,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다고 보시나요.

임강희: 제가 생각할 때 헤르만과 안나는 단순한 남녀관계가 아니에요. 가족이기도 하면서 사랑이란 감정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둘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라는 거죠. 그 어린 아이들이 함께 키워온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겠지만 헤르만이 안나를 사랑하는 것은 지켜주겠다는 사랑으로 남녀 간의  일반적인 사랑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송상은: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초등학교 1학년 때 가장 친한 남자친구요. ‘너희 둘이 사귀는 거 아냐?’ 하고 놀리면 ‘아니야 아니라고~’ 하면서 소리치는 그런 관계요.(웃음) 어떻게 보면 헤르만과 안나는 그런 사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요. 저는 실제로 그런 친구가 있었거든요. 맨날 같이 놀러다니고 항상 서로 의지하고. 친구로서 사랑하고 좋아하고 말이죠. 이 둘도 그렇게 의지하면서 산 아이들이 아닐까요. 그러다가 상처가 생기고 트라우마가 생기고, 못 보게 되니까 그리움이 생기면서 좀 더 애틋한 감정이 들고요. 둘의 관계는 그런 복합적인 사연과 감정이 담겨있는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임강희: 그래서 저희 안무를 보면요. 대놓고 ‘사랑해’가 아니라 닿을 수 없는 듯 닿을 듯한 느낌이에요.

네. 그러니까 보는 관객이 더 애틋한 것 같아요. 저 감정이 대체 뭘까 하고요.

정운선: 저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어렸을 때도 그런 친구가 있지만요. 남매 중에도 보면 친오빠가 저렇게까지 할까 싶을 정도로 옆에서 보기 부럽게 다정한 오빠나 남동생이 있잖아요. 저는 중학교 때 쌍둥이 남매가 있었는데 그렇게 서로를 아끼더라고요. 연기하고 있는 저희가 그런 감정을 마음에 담아 작품을 하고 있으니 둘이 단순한 남녀관계는 아니라는 것을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세 분이 가진 분위기가 각자 다른데요. 각자의 안나에 대해 서로의 느낌을 말씀해 주신다면요.

정운선: 제가 생각하는 저의 안나는 아련함이 가장 커요. 유약하지만 강한, 부드러운 강함이라고 할까요? 제가 그리고 있는 안나는 벚꽃잎 같은 안나예요. 벚꽃은 굉장히 작고 여리지만 피어날 때는 확하고 눈부시게 피어나고, 질 때는 한순간에 져버리죠. 또한, 벚꽃이 한순간에 지고 나서도 벚나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크고요. 안나는 버들가지 같기도 해요. 부드럽고 유약하지만 질기고 강한...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상은은 굉장히 어린 안나예요. 외모도 그렇고 작은 아기새 같아요.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죠. ‘어떻게 저 아이를 저렇게까지 할 수 있어?’ 하는 마음이 들어요. 강희 언니는 굉장히 부드럽고 강한 안나지만 센 것과는 다른 것 같아요. 끌어안고 있는 마음이 깊고 곧은 안나라고 할까요. 저도 두 분의 안나에게 도움을 많이 받으면서 연습하고 있어요.

임강희: 저도 상은의 안나에 대해서는 똑같아요. 아기새 같아요. 무대 앞쪽에 있을 때면 확 안아줘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어요. 약간 롤리타적인 그런 느낌의 안나여서 지켜주고 싶게 해요. 굉장히 여린 깃털 같죠. 운선이는 아직 무대를 못 봤지만 분명 굉장히 깊은 안나가 나올 거예요. 얘기를 서로 나누나보니까 만나지는 부분도 있더라고요. 곧고 깊은 안나가 나올 수 있도록 열심히 서로 격려하며 노력하고 있어요.

송상은: 아직은 제가 26살이 안됐잖아요. 26살의 안나를 연기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저는 일단 14살의 안나를 정말 잘 해야겠다 싶어서 뒷부분의 안나를 있는 힘껏 하려고 해요. 그에 비해 강희 언니의 안나는 좀 더 여인의 안나랄까요. 무게감도 있고 곧고 질긴 안나예요. 운선 언니는 정말 깊이 있는 안나가 나올 것 같아요. 정운선 배우가 가지고 있는 이상한 진실성 같은 게 있거든요. 연습하다가 언뜻언뜻 그게 보이면 깜짝깜짝 놀라요. 정말 세 배우가 다 달라서 연출님이 하나하나 고려하신 것 같아요. 안나의 여성스러움, 안타까움과 안쓰러움, 어렸을 때의 모습, 품어줄 수 있는 무게감 등 서로서로 배울 수 있게끔 만나게 해주신 것 같아요.

‘블랙메리포핀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넘버나 장면이 있다면요?

송상은: 저는 ‘기억의 방’이에요. 유일한 솔로곡이자 유일하게 안나만 봐주시는 부분이죠.(웃음) 정말 그걸 할 때는 잘 몰라요. 사실 그때 울거나 그러지는 않거든요. 노래와 몸짓만 하는데 언니가 하는 걸 지켜보면서 정말 안타까움이 느껴지더라고요. 관객의 입장에서 좋은 부분인 것 같아요. 물론 안나를 연기하는 관객의 입장이지만요.(웃음)

임강희: ‘메리를 기억해’가 좋아요. ‘알잖아 메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그 때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하면서도 맘이 아프고 갑자기 제가 밝은 것처럼 하고 있어도 ‘행복은 마음에서 시작하는 거야’ 같은 말들, ‘엄마가 되어준 메리’ 하고 노래하는 부분들이 굉장히 슬프더라고요. 하면서도 슬펐어요. 저는 그 장면이 참 좋아요.

정운선: 저는 마지막 장면이요. 정말 긴 대사가 아닌 단 하나의 대사가 주는 울림이 커요. ‘동의합니다’의 깊은 의미와 울림이 인상적이에요.

우리는 모두 아픈 기억 하나쯤은 안고 살아가기 마련인데요. 개인적으로 돌아봤을 때 행복을 위해 불행을 지우지 않고 간직한다는 안나의 결정, 동의하시나요?

임강희: 네. 저는 동의해요.

불행한 기억, 지울 수 있다고 해도 정말 안고 가시겠어요?

송상은: (손을 들어 보이며) 동의합니다.

정운선: 동의해요.(웃음)

마지막으로 세 분의 미래가 굉장히 궁금한데요. 개인적으로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캐릭터나 배역이 있다면요?

송상은: 저 해보고 싶은 거 진짜 많아요.(웃음) 맘마미아의 소피도 해보고 싶고, 브로드웨이 42번가의 페기소어도 해보고 싶어요. 사실 저 아직 데뷔한 지 일 년도 안 됐거든요. 지금은 그냥 무조건 열심히 하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은 안 가리고 다 해보고 싶어요.

임강희: 저는 개인적으로 발성이 클래식한 부분이 있는데요. 그런 걸 바꾼다면 루시 같은 배역을 해보고 싶어요. 그동안 정말 훌륭한 배우들이 루시를 해 오셨잖아요. 제가 생각한 루시는 섹시한 여성이라기보다는 굉장히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거든요. 만약 제가 해 본다면 여태까지 한 루시와는 굉장히 다른 루시가 될 것 같아요. 한 번쯤 욕심내보고 싶은 배역이에요.

정운선: 저는요. 이상하게도 예전부터 그렇게 남자역할들이 하고 싶었어요.(웃음) 라만차, 돈키호테, 지킬... 이상하게 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어요. 햄릿을 하면 오필리어보다 햄릿이 하고 싶었죠. 하지만 저도 일단은 주어지는 다양한 역할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고 싶어요. 매 역할 다 다른 인물이기 때문에 매 순간 최선을 다 하고 싶고요. 하지만 굳이 말씀하라시면 라만차!(웃음) 누군가 제일 좋아하는 넘버를 물어보셨을 때도 ‘라만차 좋아요’ 혹은 ‘영웅의 안중근 역할 너무 좋아요’ 했어요. 여자들은 그런 역할들이 없다 보니 아마 안타까워서 그런가 봐요.(웃음) 

박세은 기자_사진 이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