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시도.., 젊은 감각에 추월당하다.

‘시베리아 대탈주 로드 씨어터’란 부제가 무색해지는 협소한 무대- 소극장 공연임을 이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창한 부제에 현혹(?)되어 어느정도는 화려한 볼거리가 있으리라 기대했던 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뒤로한 채 공연은 시작되었다.
한줄기 빛도 허용치 않는 어두운 무대에서 빨간 불빛 하나가 객석을 향해 비춰지면 사내들의 좌충우돌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내 전등불이 켜지고 자신들이 어딘지 모를 지하창고에 갇혀있음을 파악한 내복차림의 사내들은 한층 더 격렬히 서로를 경계한다.
그들은 서로의 정체가 무엇이고 왜 납치되어 왔는지 탐색하는 과정을 상당한 시간에 걸쳐 보여주는데, 관객으로 하여금 그 과정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고 극중 상황파악이 어느정도 되었을 즈음, 세 인물은 역할극을 통해 자신들의 과거사를 구체화 시킨다.

6.25때 헤어진 아버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어머니에게 러시아제 텔레비전을 사드리고자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나서게 된 강택구. 남이나 다를 바 없는 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강두만의 냉소적 태도에 자신이 이복형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만다. 또 자신의 딸이 수중교예단에서 당의 총애를 받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하는가 하면 남한의 유행가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두만강’에서 따온 ‘두만’이 이름이 되었다는 강두만은 남한에서 철없는 막내아들로 생활하다 중풍에 걸린 아버지의 권유로 모스크바에 오게되었으며, ‘혈육의 정’에 대해 무감각하다. 뿐만 아니라 존재조차 모르던 북한의 이복형이 하필이면 유명인사도 아닌 벌목공이라며 불쾌해 한다.
또 납치된 기자의 펜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주겠다며 큰소리치는 최용갑은 애초부터 특종에만 혈안이 된 인물이며, 갇혀있는 상황에서도 북한으로 귀순하면 영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대처방안의 하나로 저울질하는 속물기자다.

‘하이퍼 리얼리즘’을 추구한다는 극단의 의도가 작용한 탓인지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세 인물이 각각 현실과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또한 이미 1996년에 초연된 이 작품이 당시만 하더라도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먼 남북문제가 그나마 이전과는 사뭇 다르기에 그다지 진한 감동으로 가슴을 파고들지는 않는다. 그토록 가슴 벅차고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었던 이산가족 상봉 장면이 회를 거듭할수록 담담하게 다가오는건 혼자만의 느낌일까?
강택구와 강두만이 배다른 형제임이 드러나고 각기 다른 어머니로 갈등의 초점이 맞춰지면서 둘의 관계는 보다 깊은 애증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나 강택구의 어머니가 헤어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수절하며 살았다느니, 강두만의 어머니는 조강지처를 둔 아버지에게 허수아비와 다름없었다며 몸싸움하는 장면은 신파적이기까지 하다. 연출자 역시 젊은 세대의 이러한 감각을 고려하였는지 극중 인물로 하여금 화려한 조명아래 D.J DOC의 춤과 노래를 선보이게 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계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극의 분위기 전환상 어느정도의 효과는 거두었다고 볼 수 있지만 어쩐지 작품 전체의 이미지와 동떨어진 일종의 이벤트성으로 보여져 허탈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그로인해 느껴지는 후반부의 감동은 더욱 배가된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구를 찾아낸 강두만과 최용갑은 강택구에게 함께 남한으로 갈 것을 권유하지만 강택구는 또하나의 이산가족을 만들기 싫다며 그들을 떠나보내고 지하창고에 홀로 남는다. 이어서 들려오는 강두만의 목소리 “형! 꼭 살아남아야 돼! 꼭 살아남아!”.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을 형이라 불러준 두만의 외침에 “아바이~”라는 절규를 토해내는 강택구!
결말 역시 상투적이라는 인상을 떨칠 수 없으나 보는 이의 심금을 흔들어 놓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막이 내린 후 무대인사를 위한 조명이 켜졌을 때, 여전히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강택구’라는 인물로 남아있는 배우 권오진의 모습은 더 큰 감동으로 각인될 듯 싶다.
무거운 주제, 상투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1996년 초연이레 거듭된 앵콜공연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건 이러한 내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학적 요소의 부자연스러움과 감정의 동요를 강요하는 듯한 신파적 스토리 전개가 아쉽지만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이미 ‘강두만’의 모습과 닮아있는 현실에서 이 작품의 앵콜공연을 계속되어질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분단의 상처가 통일의 이름으로 치유되기 까지는.

출처 : 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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