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쌔신>에서 보았던 임문희의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져 있었다. 기자가 알아보자 직접 잘랐단다. 기다리기 싫어 웬만하면 미용실엔 가지 않는 그의 선택이다. “엉망이에요”라고 말하지만 짧아진 머리카락만큼 이목구비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연극과 뮤지컬, 모두 만나다

배우 임문희. 연극 <날 보러와요>의 미스김, 뮤지컬 <어쌔신>의 프롬 등, 개성강한 캐릭터와 연기로 관객들의 눈에 띈 그는 올해 데뷔 8년차 배우다. 한 해 한 편, 혹은 두 편 정도 출연하던 그가 올해엔 모두 네 편(<돈주앙> <마라사드> <날 보러와요> <어쌔신>)의 무대에 오르며 ‘배우 임문희’를 각인 시켰다.

“제 생애 최다 작품이었어요(웃음). 원래 제 목표가 느리게 사는 거에요. 작품도 다작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요. 물론 좋은 작품을 많이 하고 싶지만 그런 작품이 많이 있지 않고 내가 좋아한다고 캐스팅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도 의도하면서 쉬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쉬기도 했지만 이번엔 다들 좋은 작품이었어요.”

특히 올해 출연한 두 편의 연극, <마라사드>와 <날 보러와요>는 연극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무대였다. 대형 뮤지컬에 출연하며 짜여진 대로 넘어가야 하는 감정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뮤지컬만이 줄 수 있는 임팩트가 있어요. 노래가 들어가면서 감정을 더 크게 표현할 수도 있고 효과적으로 표출할 수도 있죠. 그런데 너무나 짜여진 대로만 하는 것, 나는 아직 내 감정을 다 하지 못했는데 여기서 노래하고 노래 끝나면 바로 대사를 해야 하고, 그런 것에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연극을 해보고 싶었죠. 특히 <마라사드>는 박근형 연출님 특유의 ‘성을 쌓고 다시 무너뜨리고 새로 쌓는’ 과정을 겪으면서 힘들었지만 정말 좋았어요. 그 과정에서 창조적으로 나오는 게 있었으니까요.”

<날 보러와요>에서의 순진하지만 엉뚱한 미스 김 역시 “미스 김이 너무 하고 싶었다”며 운을 뗀다. “평범한 역할은 아니지만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하고 싶다’고 제작사 분에게 말씀을 드렸었죠. 작품을 본 분들은 미스 김이 그냥 너 같다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사람한테는 여러 가지 면이 있잖아요. 그런 말 들으면 좋던데요.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순 없지만 캐릭터를 ‘나’로 만든 것이니까요.”

느린 배우의 조금은 다른 행보


연달아 평범하지 않는 캐릭터로 무대에 서다 보니 역시 캐릭터처럼 성격이 센 것(?) 아니냐는 오해도 받지만 실상은 반대다. 활발하고 외향적인 줄 알았다는 말에 깔깔 웃어 보인다.
“그런 면은 많지 않아요. 사람들이 많을 때는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에요. ‘저요저요저요’하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전 저랑은 잘 놀아요. 책 읽고, 여행 다니는 걸 정말 좋아해요.”

올해에도 <어쌔신> 이후 홍콩과 태국 등지를 20여일 동안 다녀왔다. 배우로서 성취감과 돈도 중요하지만 그에겐 무엇보다 ‘세상 보기’가 가장 먼저다.
“왜 세상에 태어났냐고 물어보면 전 성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냥 세상을 모두 보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능하면 많이 나가서 경험하고 보는 것이요.”

최근 여행을 다녀오는 바람에 캐스팅 제의가 다른 배우에게 넘어가기도 했지만 연연하진 않는다. 그보다 더 값진 걸 눈에 담고 왔다고 생각해서다. 답답한 도시 생활보다 호수가 있고 공기가 맑은 고향이 훨씬 더 좋다는 그는 “원래 농사 짓는 게 꿈이었다”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그림 그리는 걸 즐기기도 한다.
“가끔 혼자 그림을 그리는데 머릿속에 있는 걸 그리는, 말 그대로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려요(웃음). 사람마다 다 자기 세상이 있는데, 요즘엔 다들 바뻐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삶의 의미가 다 다르겠지만 나를 알고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무용 역시 그가 사랑하는 장르다. 보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추는 것도 좋아한다. 그는 <날 보러와요>에서 미스 김이 선보인 춤에 대해 “저 세상으로 가신 피나 바우쉬를 추모하듯 추었다”라고 말했단다. "다시 태어나면 무용수가 되고 싶다"고 할 정도로 무용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무용으로 비공식적으로 데뷔(?)에 대한 에피소드도 있다.
“‘데카당스’라는 무용단이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할 때, 관객을 무대로 데려가서 함께 추는 시간이 있어요.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무용수분이 저에게 손을 내밀더라고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무대에 올라갔죠. 그때 정말 원 없이 춤을 췄던 것 같아요. 제 데뷔작은 사실 그 무대였다고 할 수 있어요(웃음).”


7전8기, 소원은 이루어진다

임문희에게 무대와의 첫 만남이 공연장 안내도우미였다. 대학에서 뮤지컬과는 전혀 상관없는 과에서 공부를 하던 그에게 공연장 도우미는  오랜 꿈인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다. 이와 함께 노래와 무용 등을 공부해 나갔다. 그 시기 공연장 수많은 공연을 보며 꿈을 키우던 그에게 가장 필이 꽂히는 작품은 바로 <지하철 1호선>이었다. “가깝고 친숙한 우리 이야기를 너무 훌륭한 선배님들의 연기로 펼쳐 보이는데 반한” 그는 망설이지 않고 2001년 <지하철 1호선> 오디션을 응시했다.


하지만 오디션은 번번히 3차에서 떨어졌다. 그 사이 <한 여름 밤의 꿈> <토요일밤의 열기>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지하철 1호선>에 승차하는 건 요원해 보이기만 했다. 오디션 장에 가면 “쟤 또 왔네”란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2005년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오디션에 합격했다. 2001년부터 응시해 2006년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선 것이다.

“나중에 들어보니까 저를 중심으로 배우를 뽑았다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저에게 딱 맞는 캐릭터가 없어서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뽑으면 저를 도저히 뽑을 수가 없었대요. 정말 감사했죠.”

꿈 하나로 데뷔해 지금까지 색깔 있는 연기를 보이고 있지만 어려운 점도 있었다. 제작 시스템에서 배우는 한 없이 약자로만 느껴졌고, 무대 위에서와는 다른 배우들의 모습을 볼 때면 실망을 느끼기도 했다. 남들은 그냥 지나치곤 했던 문제에 대해 ‘왜 이런지’를 두고 고민하며 많이 부딪쳤다. 그리고 그 결과 단지 열정만 가지고 배우를 할 순 없다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공부했다.

“중학교 때 일기장을 보니까 ‘나는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라고 써 있더라고요. 생각해보니까 소원하는 건 다 이루었어요. 뮤지컬 배우가 됐고, <지하철 1호선>에 출연했고, (최)정원 언니를 만나보고 싶었는데 <토요일밤의 열기>를 하면서 만났죠. 물론 시간이 굉장히 많이 지난 후에 되긴 했지만(웃음).”

그는 인터뷰를 위해 고향인 충남예산에서 막 올라온 참이었다.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놓고 아쉽게 올라온 듯 하지만 서울엔 또 그만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있다. 골목과 창이 정말 예뻐 공연이 끝나면 “빨리 가서 창가에 앉고 싶은” 공간이라고 한다. 확실히 임문희는 예쁜 여배우의 아우라는 넘어선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2010년 첫 무대가 어디가 되든 그의 빛나는 존재감은 바래지지 않을 것 같다.

 

항상 싸인을 부탁하면 정성이 담긴 아름다운 글을 써주시잖아요. 그런데 <어쌔신>에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프롬'의 연기를 보여주셨어요. 감성적인 배우 임문희씨에게 어떻게 그런 강한 연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궁금해요!^^(pyj920pyj님)

임문희 : 제가 주로 사용하는 닉네임이 ‘빨강머리앤엘리스종달새게으름뱅이토토로얼룩말프랑스스페인여배우’에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넣은 것인데 길죠? 빨강머리앤처럼 자연을 자연을 사랑하고 싶어서 자연, 날씨, 삶에 관한 것을 간단하게 싸인에 넣곤 해요.
그런데 제가 강한 연기를 했었나요? 프롬은 연기하는 데에는 여러 갈래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강하게 임팩트를 주는 것과 인간적인 면에 광기가 섞을 수도 있고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프롬은 뭘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도 그 여자의 광기가 묻어 났으면 했었어요.

임문희님이 추구하는 연기방향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무대 오르기 전과 공연이 끝난 뒤 어떤 기분인지 궁금합니다.(sw7261님)

임문희 : 저는 ‘그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연기해야지’가 아니라. 그 사람이 되면 무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가령 무대에 돌이 날아와도, 그 사람으로만 있으니까 문제될 건 없죠. 연습하는 과정은 그 캐릭터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왜 이 인물이 그렇게 생각했을까 생각해요. 분석 같은 건 잘 못해요. 또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많이 떨고 그런 편은 아니에요. 음…별 생각 안 하는 것 같아요. 끝난 후에는 빨리 집에 가야지 생각하고요. 하하.

<스위니 토드>에서부터 눈여겨 보아왔어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신 것 같아요. 멋진 모습 많이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질문이요!! 함께 연기한 상대 배우 분들 중에 이상형이 있다면요? (envy1007님)
임문희 : 아하하. 이상형 없는데요. 음… <스위니토드>할 때는 류정한 선배님의 카리스마가 멋있었어요. 남자로서 좋아한 건 아니고요, 하하. 선배님다운 모습이 있으신 것 같아요.

너무 강한 개성 때문에 연기 폭이 제한되는 손해가 있다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ektha9님)

임문희 : 전 제가 개성이 없다고 생각 하거든요. 개성있는 역할들을 많이 주셨죠. 극중 여자 캐릭터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예쁜 주인공, 하나는 그걸 뒷받침해주는 강한 캐릭터가 대부분이죠. 예쁜 여주인공은 이미 많은 분들이 계시니 탐낼 수 없었고, 개성있는 역할을 많이 한 거죠. 저도 할 수 있는 게 많은데 한정적으로만 주실까 생각한 적은 있어요. 그런데 예쁜 여자 주인공은 저도 별로 매력을 못 느끼겠어요. 예쁘지 않은 캐릭터, 예를 들어 <시카고>의 인물들은 정말 매력 있죠.



글: 송지혜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ong@interpark.com)
사진: 이미지 팩토리_ 송태호(club.cyworld.com/image-factory)



[ⓒ 플레이DB www.play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