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 내전" (각색,연출:박현욱 출연:신연미, 김영호, 김버들, 최근혁, 임경묵, 김은애, 김동하, 이수민, 이재윤, 이재영, 곽래영, 조경미 제작:극단 선한배우 & 극단 불 극장:대학로 드림시어터 소극장 별점:★★★☆☆) 작연에 "갈매기" 를 봤었던 극단 선한배우의 공연이다. 포스터의 제목위에 작게 영어로 원작이 "12인의성난남자들" 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제목을 왜 저렇게 바꿨을까? 내용을 알고 있어서 중간에 좀 지루하다. 마지막 장면의 의미는 뭘까?

배우분들 연기도 다들 잘하시고 발음도 다 좋아요~어두울 수있는 내용인데 중간중간 마다 코믹적인 요소들이 있어서 재미있습니다~추천합니다!!!ㅎㅎ

마네킹, 의자, 위에서 아래로 비치는 조명.

비니를 쓴 남자가 덤덤히 무대로 걸어나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다. 인상이 짙은 그 사람은 정의에관한, 삶에관한, 사랑에 관한 거대한 담론을 너무나 가볍게 던져주고 관객석 사이로 사라진다. 그리고 극은 시작 된다.

맹신하는 기독교인, 한사람의 생사를 가리는 자리보다 야구관람이 더 중요한 남자, 눈과 귀를 쫑긋세운채 바삐 연필을 움직이는 배심원단의 대표, 화장고치기 바쁜 직업여성, 긴 가방끈 만큼 가소롭다는듯 입꼬리를 늘어트린 지식인, 그리고 차분한 표정이지만 뜨거운 생각을 품은 젊은 여자. 이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배심원으로 모여 어머니를 죽였다는 혐의를 가진 한 소년의 유무죄를 가리기 시작했다.

맹신하는 자의 뜬금없는 찬송가와 기도들은 연극을 보는내내 나를 웃겨댔다. 번뜩거리는 광신도보다는 우직하게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작은눈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행여 자신이, 자기의 생각하는 자신의 길에서 엇나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가끔 폭폭 내쉬었다.

한 소년의 인생이 걸린 문제보다 계속해서 손목위의 작은 시계가 더 크게눈에 들어오는 듯 한 남자는, 극중에서 폭력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다른 배심원들을 함부로 대하는 그의 태도에선 단지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미움만 보인것이 아니라, 자기말고는 아무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인간 본연의 악한 모습이 보였다.

배심원단의 대표를 맡은 젊은 남자는 외모부터 수려했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프로도같은,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그가 다른 배심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때면 그가 얼마나 남의 의견에 집중하는지, 그러므로써 자신의 의견이 확고한 사람이 아니라는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화장만 고쳐대고 촌스런 콧소리를 내는 직업여성은 복장부터 자신의 이미지가 어떤것인지 강렬하게 드러냈다. 사실 극중반부까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는 일은 없었는데, ''치킨헤드'' 라고 자신을 욕하던 말을 하버드를 졸업했다는 나름의 엘리트에게 뱉어줄때 나는 묘한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괄시받고 천대받는 그녀가, 합리적인 의심과 자신이 평결을 내려야할 피고에대한 일말의 공감을 보여주었을 때에도 참 속이 시원했다. 그녀는 그렇게 가끔 호쾌하게 뺨도 날려주면서 좁은의자에 앉아 공연을 보는 나에게 사이다같은 쾌적함을 선사했다.

배심원 중 가장 공부를 많이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엘리트여성은 모두를 가소롭게 여기며 논리를 차곡차곡 쌓아가지만, 합리적인 의심이 돌부리처럼 솟아오를때마다 휘청휘청 거리며 그저 자신의 아집과 편견을 논리로 무장했을 뿐이라는 사실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초반부에 냉철하게 사건을 정리해가던 그녀가 후반부에는 비명만 꽥꽥 질러대며 자신은 틀릴 수 없다는 양 발버둥치는 모습은 참으로 씁쓸하게 다가왔다. (전에 이곳 드림씨어터에서 갈매기라는 연극을 본적이 있는데, 마샤역할을 맡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 연극에서도 여전히 극에 몰입하고 열중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좋았으며, 다시 관객과 배우로 만날 수 있어서 반가운 느낌마저 들었다.)

다른 배심원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차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정장을 입은 여성은 극에서 소용돌이를 촉발시키는 방아쇠같은 느낌을 주었다. 침착한 톤으로 자신이 해야할 말을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고 해내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멋졌고, 또 거기 있는 배심원들 그 누구보다도 더 당당하고 정직해보였다. 끊임없이 설득하고 포기하지 않으며, 나중에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대담한 승부수로 증명해내어 다른배심원들 모두를 무장해제 시켜버린 그녀는 진정한 투사같았다. 마치 1900년대 정부에 맞서던, 대학가의 젊은 여성 운동가를 보는것 같았다. 그녀의 차가운 표정과 상반되게 그녀가 품은 뜨거운 생각은 보는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를 찔렀다는 혐의를 받은 소년. 그는 억울해보이기보다는 분노에 가득 차 보였다. 관객들을 향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그저 끝없는 분노를 쏟아내는 그는 처음엔 어머니를 죽인 사람에 모습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소년의 입장을 생각하게되고 그가 죽이지 않았을 일말의 가능성이 점쳐지기 시작할때부터 소년의 분노에 찬 말들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너희들은 누구를 판단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라고. 애초부터 소년은 판결을 받을 생각자체가 없었던것 같았다. 그가 누구를 죽였든 어떤 어려움을 겪었던, 다른 인간이 한 인간을 판단하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인가. 이해한다는것은 무엇이며, 내가 내리는 판단의 논리적 근거들은 정말 공정한 것인가. 소년이 등장할 때마다 여러개의 생각들이 떠오르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극은 지루할 틈이없었다. 영화를 보는 듯한 슬로우모션 부터, 무대 뒤쪽에 끊임없이 크고작은 인물들의 행동들이 관람하는 나의 눈을 가득채워주었다. 웃음은 적당한 반동으로 계속해서 튀어올랐으며 허리가 아파 비스듬히 기대 극을 감상하던 나는 끝날때 쯤엔 자라마냥 목을 앞으로 빼고 있었다. 허리가 아픈 사람이 목도 아프게 생겼다. 극의 내용은 후기에 남기지 않도록 하겠다. 궁금하다면 누구든 보러가시라. 나는 너무 좋았다. 즐거웠고. 그래서 연극에 나온 모두에게 연극을 만든 모두에게 감사했다. 다른 작품속에서 이들을 만난다면 금새 알아차리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연극이 마치고 배우들이 관객들을 만나러 로비로 나왔을때 나는 예의 그 비니쓴 남자의 호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어떠니! 속 시원하지 않니! 가진게 없는자들을 위해..! 언더독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