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주 일요일에 국립극단에서 하는 박본 작가의 신작 <사랑Ⅱ LIEBEⅡ>를 보게 됐는데, 꽤나 기대하는 중이다. 그는 한국계 독일 극작가로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괄목할 만한 연극 활동을 보이고 있다. 명성은 익히 들었던 터라 이제 직접 내 두 눈으로 확인만 하면 될 일이었다. 보고 싶은 공연을 앞둔 때나,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릴 때는 시간이 참 느리게 간다.

그런 와중에 혜화동 1번지에서 박본 작가의 다른 작품이 공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 잘 됐다 싶어 당장 관람하러 갔다. 그에게 베를린연극제 희곡상을 안겨준 <으르렁대는 은하수>라는 작품이었는데, 매우 흥미로운 연극이었다.

일단 무대 디자인부터 남달랐다. 요즈음은 잘 활용하지 않는 원형 극장이었다. 무대 위엔 자그마한 테이블 두 개가 놓여있고, 색색의 고무공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몇몇 고무공은 관객의 영역에까지 침범해 있다. 자리에 앉으면 객석에 딸린 일회용 라텍스 장갑이 눈에 띈다. 그리고 시끄러운 하우스 음악과 각각의 관객마다 주어진 투표 용지. ''''대체 무슨 연극이기에?''''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극은 은하계의 지도자를 뽑는 선거가 열리고, 그 선거의 각 후보들이 나와 후보자 연설을 한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그 후보들이... 김정은, 도널드 트럼프, 박본(오너 캐릭터), 소심한 스탠드업 코미디언, 독일 사회민주당의 한 정치인, 기린이다. 정말 골 때린다. 분명 후보자 연설회인데, 다들 나와서 자기 할 말만 하고 쏙 들어간다. 말에 논리나 맥락은 없다. 갑자기 관객들에게 "개새끼"라고 욕을 하기도 하고, "통일을 희망하는 김정은이 직접 남쪽으로 내려와 박근혜와 조우한 뒤, 협상이 결렬되자 가차 없이 핵폭탄을 날렸다"는 식의 요설을 늘어놓는다. 이따금 배우들은 관객들을 대놓고 골려주기도 한다. 나는 이날 처음 보는 사람과 손을 마주 잡고, 그와 눈을 맞추며 그에게 뺨을 때려야 했다.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혼란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겉보기엔 단순히 난잡한 연극 같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 속에 담긴 귀중한 풍자 정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본 작가의 말마따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여전히 폭력이 난무하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으며, 악덕 정치인들이 득실거리는 "미친 세상"이다. 이 세상에 예술은 어떻게 대응하냐. 박본은 이러한 중대한 물음에 한 가지 극단적인 답을 내놓은 것이다. "미친 세상"에 미친 방식으로 대응해 보자. 그래서 그는 참 겁도 없이 상상력의 한계를 뚫고, 전방위적인 비판을 감행한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주목했던 점은 그렇게 단순히 현실을 냉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는 법"까지 일러줬다는 것. 기린을 향해 고무공을 마구잡이로 던졌던 관객들이 극 후반부에 가서는 "You Raise Me Up"을 배경으로 서로에게 벅참을 느낀다. 단 70분 만에 이 변화를 이끌다니, 대단하다.

또 한순간도 지루할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도 좋았다. 연극은 기본적으로 재미있어야 한다. 극장을 나올 때 생각거리를 한아름 던져 주더라도, 최소한 극을 보는 순간만큼은 몰입하게 만들어야 한다. 극을 보면서 필요 이상으로 자리를 고쳐 앉거나 휴대폰에 손이 간다면 그 연극은 당신이 잊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으르렁대는 은하수>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품이었다. 배우들의 대사에 아무 논리나 맥락이 없다고 해서, 말의 맛마저 휘발해 버린 건 아니었다. 분명 내 앞에 있는 인물은 김정은이니, 도널드 트럼프니 하는 사람들이지만 다들 어딘가 하나씩 나사가 빠져서 도리어 그 어떤 인물들보다도 친숙하고 유머러스하게 다가왔다. 여기에 원형극장의 특징을 잘 살려 관객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지속적으로 시도하니, 인물들의 매력은 배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설득의 3요소는 에토스(발화자의 인격), 파토스(감정), 로고스(논리)요, 성공적인 설득을 위해선 에토스->파토스->로고스 순으로 접근하라고 했다. 그 말이 딱 맞나 보다.

어쩌다 보니 번지르르 칭찬만 했지만, 아무래도 실험성이 강한 연극이라 모든 사람이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갈등 구조가 희미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연극에 친숙한 관객이라면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혹 마음 편히 연극을 "보러" 온 관객이라면 극심한 피로감을 호소하며 욕지거리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작 박본은 아무 신경도 안 쓸 듯하다. 뭐, 어때. "연극일 뿐인데". 다음주 일요일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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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했던 연극이었습니다
박본 작가님이 더욱 궁금해지는 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