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모자이크 하는 사람 끊임없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발견을 응용해서 의미 있는 조합을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이미 정해진 틀에 짜 맞추는 것이 아닌, 퍼즐을 할 때처럼 하나씩 붙여가면서 자기가 가고자 하는 개념, 주제, 연극적 방향성 등의 길을 내는 사람이 연출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분사해서 배우의 언어, 조명, 무대 등을 통해 여러 조각조각을 모아 극장에서 하나의 창으로 만들고, 그 결과로 나오는 하나의 빛을 겸허하게 기다려 봐야 하는 것이죠.

‘연극은 배우 예술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배우를 투사하지 않은 이미지, 배우를 매개로 해서 객석으로 전달되지 않은 언어, 아이디어, 이미지는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저 역시 이를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즉 어딘가를 통과하지 않은 것은 단지 연출가의 상상이나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학 졸업할 때 연극 혹은 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을 했는데 전공도 경영학이었고, 연극반도 아니었고,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까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까 막막했었죠. 연출이 뭔지도 잘 몰랐지만 참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신기한 일이에요. 대학 다닐 때 연극 보는 걸 굉장히 좋아했고, 또 많이 찾아 봤습니다.

졸업 후 극단 무천에서 연 연출 아카데미에 다녔고, 당시 직장인 극단에서 연출도 했습니다. 과연 내가 정말 연출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할 수 있을지 스스로 검열하는 것이었죠. 지금은 사라진 혜화동 로터리의 ‘예술극장 한마당’이라는 곳에서 직장인 극단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했는데 당시 한겨레 신문 칼럼에도 실리고 극단 작은신화 친구들도 우연히 보러 왔어요. 그 때 최용훈 연출을 만나서 극단 작은신화에 들어가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극장적인 상상력 극장에서만 복원될 수 있는 게 있어요. 현실을 삽으로 뚝 떠와서 극장에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극장에서만 가능하고 확장될 수 있는, 그러기 위해서 극장이 가지는 의미와 상상력을 극대화 한 작품을 좋아합니다. 시간을 조절하는 장르가 영화라면, 연극은 공간의 예술이지요.



네 편의 연출노트 모든 작품을 할 때 글을 네 번 씁니다. 하나는 기획 홍보팀을 위한 연출노트로, 이 연극을 볼 가상의 관객들을 위해서 이 작품은 어떤 것을 추구하고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프로덕션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할 지에 대한 글입니다. 두 번째는 스텝들에게 하나의 방향을 공유하는 스텝들을 위한 연출 노트이고, 세 번째는 배우들을 위한 글입니다. 작품 시작할 때 쓰는 이 글들은 작품의 최소한의 구조, 캐릭터 등에 관련된 것인데 쓰다 보면 동어반복이 있지만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다르게 나와요. 마지막 네 번째 글은 프로그램에 나갈 연출의 글입니다. 최소한의 공유, 그걸 근거로 해서 자유롭게 나오는 발상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일단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면 특별한 경우 아니면 대본을 잘 보지 않습니다. 연습장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진정한 것이다, 준비된 것보다 여기서 발생된 것이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 연습장 안에서 모든 걸 다 해결해야 하는 거죠. 거기서 자유로워야 하고, 그런 것을 제가 조금은 즐길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일은 별로 도움이 안 되요. 늘 관찰하고 바라보면서 생각하고 찾아내고, 발견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즐겨라 정말 작업을 즐겨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곳이 연습장입니다. 일상에서 하지 않은 모든 것을 하죠. 언어를 심하게 쓰진 않지만 화가 나면 화도 내고, 같이 놀고, 잘 안되면 같이 해 보기도 하고. 막 날아다녀요(웃음). 기타무라 소우는 연극이 자신에게 장난감이라고 했어요. 그만큼 자기를 즐겁게 해 주고,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죠. 연습장이 놀이터가 됩니다.

넓고 풍부한 독서 늘 후회하고 있어서 후배들에게도 많이 하는 이야기가 독서를 더 폭넓게 하라는 것이에요. 사실 연극에 대한 책은 몇 권만 읽으면 되지만, 20대 후반, 30대 초반까지 읽어야 할 인문학적인 넓은 독서가 제게 부족했어요. 그런 부분이 아쉽죠. 독서에 대한 내공이 축적되어 있지 않으면 나이가 들어 뭘 읽으려고 해도 잘 안 읽히는 것도 있고, 못 읽게 되는 것도 있으며, 읽었다 치고 넘어가는 것도 있는 등 부실해져요. 조금 더 많은 책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들을 섭취하는, 그런 시작이 필요했던 것 같은데 반성이 되죠.





<호기우타> 일본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기타무라 소우의 작품 ‘호기우타’가 1997년에 아르코극장 대극장에서 <축복의 노래>로 번역되어서 공연했어요. 이제까지 제가 봤던 작품 중에 최고의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극적인 설계를 함에 있어서 제게 굉장히 많은 영감을 줬어요.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 등 어디에나 다 있을 수 있는데 연극만이 할 수 있는 것, 극장에서만 가능한 것이란 무엇이다, 라는 걸 저에게 보여주는 연극이었어요. 지금도 가끔 답답할 때 그 희곡을 읽어요. 서양에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다면, 동양에는 기타무라 소우의 ‘호기우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페르귄트> 올해 LG아트센터에서 했던 극단 여행자의 <페르귄트>를 상당히 재미있게, 좋게 봤어요. 일단 그 작품을 개인적으로도 좋아하고, 또 어려운 작품인데 아주 탁월하게 이미지들을 잘 형상화 했고, 무대, 조명, 의상 등 전체적인 앙상블, 소위 잘 응축된 연출의 구현이 흔들리지 않고 이야기를 성실하게 전개해 나갔죠. 그런 점에서 양정웅 연출가가 정말, 진일보한 그런 연극적 형성화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해요.



실종자 3부작 2007년에 공동창작으로 <착한 사람 조양규>를 공연했는데, 실종자에 대한 이야기였죠. 흔히 아는 사건사고의 실종자가 아니라 우리 옆에 있지만 잊혀진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고요. 그 작품을 기획할 때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3부작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연극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연극도 해야겠지만, 때론 이성으로 주제에 헌신하며 머리도 울릴 수 있는 것이거든요.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 반드시 한번 해야 될 이야기, 우리가 잊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과 소통하고 극장 안에서 무얼 복원시켜서 우리의 마음과 머리를 가열시키고 더 뜨겁게 반성, 혹은 인식을 하게 해야 하는 것인가, 숙제처럼 여기고 있었어요.


그 1부가 <착한 사람 조양규>였고, 2부가 <21세기 여인>이에요. 각 나라의 군인들이 상대를 학살하는 것 보다 더 무서운 건 이데올로기의 편차 때문에 일반인이 일반인을, 한 동네에서 살육했다는 것이고, 이런 일들은 다 잊혀졌습니다. 전 한국 전쟁 때에도 홀로코스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001년 태풍이 왔을 때 폐광에서 유골 120여 점이 발견됐는데, 수 많은 민간인들이 이유 없이 죽어간 거에요. <21세기 여인>에서는 동굴 안에서 죽었던 가상의 어린 소녀가 등장합니다.

3부는 7, 80년대 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60년대 말부터 수 많은 한국인 근로자들이 독일의 간호사로, 광부로 외국에 갔어요. 몇 년 전 한 TV 프로그램에 중동으로 간 후 30년간 실종된 남편과 그 남편을 기다려온 부인 이야기를 봤어요. 부인은 남편이 돌아온 순간 치매에 걸려 기다린 30년의 기억을 잃어버렸죠. 돌아온 남편은 그런 아내를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며 매일을 삽니다. 실종자 3부작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걸 본 순간 이 이야기를 마지막 작품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자, 여자,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가 3부작으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관객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것보다 관객들이 다양하고 폭넓은 공연을 체험할 수 있는 큰 울타리를 만들어서 관객들을 안아주고 에워싸야 한다고 생각해요. 뮤지컬 붐이나 연극열전과 같이 특화된 레퍼토리를 묶어서 선보이는 시도가 굉장히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가고 있지만, 그런 체험에만 익숙해지는 관객들이 과연 작품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관객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연극, 퍼포먼스, 무용 등 다양한 공연예술을 체험하고 자신의 인식체계에 자그마한 틈을 열어주는 네트워킹이 진정한 무대와 객석의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해요. 진정한 피드백은 극장에서 어떤 체험을 하고 나왔을 때 바라보게 되는 햇빛, 도시, 혹은 자신의 일상에서 아주 작은 틈을 열고 무언가를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인식이 굉장히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거든요. 그런 관객들을 위해 공통의 터를 만든다는 정신과 실천이 굉장히 중요한 시점에 왔다고 생각하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정리: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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