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스테이지에 선 또 하나의 배우
배우가 연기를 하듯, 연출가도 연기를 하는 제2의 배우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관객을 대상으로 연기를 하지만, 연출가는 배우와 스텝을 상대로 연기를 하지요. 재미있는 작업이 되도록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분위기를 무겁게 몰아서 진지하게 작품 해석을 도모하기도 합니다. 이끌 때도 있고 끌려갈 때도 있지요. 돌아가기도 하지만 늘 완성을 위해 한발씩을 딛지요. 연출가는 칠면조(七面鳥)처럼 끊임없이 변신하면서, 작품을 풀어내야 합니다. 배우의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지요.




극작가, 그리고 연출가
대학교 재학시절부터 연출이라는 작업에 매력을 느꼈고, 제 적성에도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저에게 누가 선뜻 “연출을 해달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또,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연출하려면 저작권을 지불하거나 제가 허가를 얻어야 하는데 대책이 없더라고요. ‘우선 내가 쓴 희곡이 있어야 연출을 하겠구나’ 생각했죠. 그래서 희곡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산만하고 중량감이 없는 작품도 더러는 있었지만 많이는 쓴 거 같아요. 그러다가 이제 나도 연출을 해도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무렵, 2005년에 극 공작소 ‘마방진’을 만들고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연출을 시작했습니다.



재미, 주제의식
재미 있어야지요. 그리고 또 제게 울림이 있는 작품이어야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또 무대에 오르는 작품은 엄밀히 이야기해서 상거래로 이루어지는 작업물이기 때문에,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재미와 더불어 의미도 던져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품을 선택할 때는 재미, 그리고 주제의식에 대해 많이 고민하는 편입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키겠다는 의미를 담은 연극을 만들겠다는 것, 사람들이 연극을 보고 한번에 변한다는 건 넌센스 입니다. 그런 단순한 사람들은 없겠죠. 하지만 연극을 본 순간에라도 ‘맞아, 스트레스 받지 말아야 해! 웃고 살아야 해’’라는 생각을 한다면, 나면 당장은 또 스트레스를 받고 웃지 못 할지라도, 자기와 똑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웃고 살아, 스트레스 받지 말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의미를 받아들이게 되지요. 연극은 미약하지만 존재감이 늘 있지요.




연극자체 - 오롯이, 연극에서 담을 수 있는
공연시간 내내 배우를 번잡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제 작품 속 배우들은 단역이라도 할 일이 무지하게 많습니다. 단원들과 작업할 때는 더욱 그런 편이죠. 그 시간들이 정신 없이 빠르게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환도 많이 주고 끊임없이 동선을 줍니다.

아직 구체적인 뼈대를 세우진 못했지만, 연극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연극에 담기 위해 고민합니다. 대중성을 갖춘 TV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을 받은 어법이나 드라마 양식들을 가져온 연극이 흥행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미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극다운’ 것들을 끊임없이 찾고, 천착하려고 합니다.



사랑, 즐거운 작업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겁니다. 배우, 스텝들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겨요. 그래서 저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기분 좋게 작업할 수 있도록 하죠. 게으른 편이긴 하지만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집중력이 높은 편이고 정열적으로 작업합니다. 연출로서는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웃음). 다만 타인들의 삶에 대해 깊게 반성할 만한 일이 이번에 있었습니다. 난생처음, 그 동안 타인과의 관계에서 매우 방자하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우고 살아야겠다고 뼈저리게 느꼈지요.

일단 작품을 올리고 나면 그 작품을 잘 안 보려고 해요. 초기에는 안 그랬는데 갈수록 여백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한편으로는 공연을 자주 보고 배우들에게 코멘트도 할 필요를 느끼지만 배우와 오퍼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배우들 스스로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가급적 공연을 안 보려고 합니다. 이건 약점이 아니라 단점인 것 같네요.




‘고선웅’ 이라는 이름의 작품들
딱 하나를 고르기는 어려워요. 살면서 제가 한 작품 전부이겠지요.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작품은 13년간 준비한 <모래의 여자>에요.


정말 꾸역꾸역 준비 했던 것 같아요. 무대가 떠오르지 않아서 극본을 쓸 수가 없었는데 손에서 놓을 수도 없었어요. 막혀있던 그 작품을 무대에 올렸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저한테 가장 큰 데미지를 안겨준 공연이었지만, 가장 보람 있었던 작업이었죠(웃음). 극단을 만들면서 한 공연들은 다 제 자식들 같습니다.




뮤지컬 <컨택트>
발레리나 김주원씨를 보면서 배우가 가진 에너지, 카리스마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리고 순수 예술 장르가 가진 고결한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어요. 예술을 표현할 때는 숭고하고 고매한 정신이 필요한 것 같아요. 표현력이 고매해 보였거든요. 연극은 작년에 봤던 <다락방>의 창의적인 발상도 좋았고, <이기동 체육관>도 건강해서 좋았습니다.




행복한 연출가
올해로 5주년을 맞은 극단 ‘마방진’ 의 작업들이 다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연출로서 잘하고 싶은 것 보다 실수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 실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서 연극을 헤치거나, 제작자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거나, 배우들이 연기하는데 재미가 없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목표는 ‘당대 행복했던 연출가’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 입니다. 찰나의 예술인 연극을 한 작업가로서는 ‘당대 행복한 연출가’로 살고 싶습니다.




즐겁게, 긍정적으로
연극은 리콜이 안 되는 상품이잖아요. 연극을 보실 때는, 관객 분들이 제품의 장점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이 작품 나빠, 돈 아까워”라고 생각하는 순간 돈도 아깝고, 시간도 아깝고 힘든 시간을 버텨야 하는 거잖아요. 어차피 되돌려 받을 수 없는 거라면, 조금은 긍정적인 태도로 공연을 보면 어떨까라는 바람이 있습니다. 공연을 볼 때 ‘이유가 있을 거야, 뭔가 좋은 점이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고 보다 보면 미덕을 한 두 가지 발견할 수 있거든요. 그러다 보면 배우가 흘리는 땀, 감명 깊은 대사 한 줄 정도는 기억에 남거든요. 재미있게 보려고 했지만 장점을 발견 못했다면, 공연을 끝까지 본 자신의 인내심을 극찬하면 되고요. 공연을 마주했을 때는 조금만 더 긍정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리 : 강윤희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angjuck@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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