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하는 사람 영어로 디렉터(director)니까 ‘지시하는 사람’인데 지시를 받기 보다 부탁 받는 게 더 기분이 좋잖아요. 혼자 무대를 만들고 직접 연기하는 게 아니다 보니, 제 생각을 나누고 공유해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예술에 대한 동경과 재미 자극을 받은 여러 지점들이 있어요. 고3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은 객석 잡지에 연극하는 사람, 연극원 이야기가 있었어요. 아무래도 대구에서 자라다 보니 문화에 대한 자극을 받는 계기가 적었었는데, 음악, 미술, 공연, 이런걸 하고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걸까, 동경하게 됐죠.

더 거슬러 가면, 중학생 때 동네에 문예회관이 지어졌는데 공원에서 놀면서 그 과정을 다 봤어요. 극장 구석구석을 알게 됐고 셔터 문 열고 몰래 무대 뒤로 가서 처음 공연을 봤는데 작품이 <아가씨와 건달들>이었거든요. 주인공이 객석으로 걸어 들어가서 관객 무릎 위에 앉아서 말을 거는 모습을 보면서, 와, 이런 게 다 있네, 너무 재미있다, 그랬죠. 그렇게 가끔씩 공연장 뒤로 몰래 들어가서 보는 도둑 관람의 재미도 있었고요.

대학 입학 후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 대학창작극제에 나가 수상도 했지만 졸업하면서 자연스럽게 취직했어요. 그런데 공연이 살면서 제일 재밌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연극원에 입학했고, 서른 살부터 연출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제가 쓴 대본을 읽고 그 누구도 본 무대에서 보여지는 그런 형식이 나올 거라고 생각을 못해요. 영화 시나리오, 드라마 대본 같다고들 하시죠. 대본 안에 무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거든요. 여러가지를 계산해서 완벽하게 대본을 쓰는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거저먹는 연출’(웃음) 이란 별명도 있어요. 연출과 배우가 서로 소통이 잘 되면 예상치 못했던 재미있는 발상, 창조적인 에너지가 나오고, 그게 너무 좋거든요. 저는 그런 공연이 좋아요.



기술적, 시각적으로 굉장히 계산적이고 타이트하게, 매끄럽게 장면을 구성하고 연결하는 것 역시 연출의 능력이긴 한데, 사실 제 무대가 거칠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좀 더 섬세하면 좋을 것 같긴 하나, 한편으론 그게 성격인 것 같기도 해요. 끝까지 그런 부분을 붙잡고 늘어지고 싶지 않은 면도 있는 것 같고요. 하지만 암전이 없다거나 장면 연결이 매끄러운 게 요즘 관객들이 원하는 분위기이기도 해서 그런 부분을 좀 더 갈고 닦아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작가의 작품을 연출한 경험이 없어요. 그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더 초점을 맞춰왔고, 한창 그런 이야기를 쓸 때인 것 같기도 했죠. 또 바로 써서 배우와 함께 만들며 수정하는 것이 공연의 특성이기도 하다 보니 나름의 습작 과정이 없기도 했습니다. 내년부터는 다른 사람의 작품 연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 방면으로 저의 가치관과 작품이 맞아야 하겠죠.




<빨래> 일상에서의 갈등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에 그걸 해결해 나가려는 노력, 이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마음가짐을 연출과 배우들이 충분히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작품이에요. 그래서 사람들과 만나지는 지점이 굉장히 다양해요. 막상 잘 만들고 나면 같이 만든 사람들과 잘 지내지기도, 또 그런 것들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죠.

또 이 작품이 제가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고, 또 제가 겪어왔던 일 중에 가장 강렬했던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제 인생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빌리 엘리어트> 지난 해 기회가 닿아 영국에 갔을 때 <빌리 엘리어트>를 봤어요. 처음에 빌리가 나와서 특유의 사투리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는데 마음이 확 녹더라고요. 대본도 너무 훌륭했고, 그걸 풀어나가는 형식도 좋았어요. 참 많은 다양한 이야기와 감성들을 느끼며, 내가 앞으로 뮤지컬을 통해 할 일이 정말 무궁무진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작품의 감성이나 풀어나가고 싶은 이야기, 그 안의 캐릭터가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너무 닮아 있다, 또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관람 며칠 후에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가서 공연 동영상이 상영되는 걸 봤는데 마지막에 빌리 엘리엇이 경찰과 파업광부들 사이에서 턴을 도는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그 순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어요. 예술가란 이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틈새, 틈바구니에서 열심히 존재해야 되는 게 아닌가.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 저런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작품입니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겠죠. 늙어서도 재미있는 사람, 할머니지만 유쾌하고 함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요. 나중에 나이가 들면 지금처럼 많은 작품을 하진 못하겠지만 꼭 메인 무대에서 할 필요 있나요? 시골, 도시의 작은 노인정에서도 어르신들 앉혀 놓고, 들어봐라, 내가 이런 일이 있었다, 하면서 낭독회를 가질 수도 있고, 살면서 지역문화에 이바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선 제 자신이 너무 소진되지 않게 살아야 할 것 같아요.




공연을 할 수 있는 틈새는 생각보다 많아요. 명랑시어터 수박이 걸어온 길을 생각해 보면, 처음에 찾아가는 문화행사로 산간 벽지, 여러 시설들에서 공연을 했고 메세나 활동, 젊은 공연예술가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도 참여했어요. 내가 뭘 하고자 하는지가 분명하면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는 것을 찾아 헤매고, 그러는 과정에서 활동이 넓혀지는 것 같아요. 기획자를 만나서 나를 소개하고, 동료가 되고 그러면서 작업이 이어지고, 연출가 자체가 일종의 페이스북 같다고 할까요.

연출가에게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보따리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이야기가 ‘스토리’가 될 수도 있고 ‘빛’이 될 수도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죠. 이야기 보따리는 경험을 통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가질 수도 있고, 누구는 너무나 뛰어나서 상상력만으로도 가질 수도 있겠죠. 그 보따리를 많이 챙기도록 노력해야 돼요. 사람들에게 풀어놓을 보따리가 없으면 사람들과 만나도 할 게 없으니까요. 또 공연은 혼자 할 수 없으니 자기의 생각을 같이 공유하고 끊임없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동료를 만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출가에겐 관객이 숙명 연출가는 관객에게 “어떻게 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공연문화가 상업적으로, 혹은 여러가지 면에서 커지고 다양한 결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관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결국 제 역할은 좋은 작품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리: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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