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가능한 조율사. 인간관계가 제일 힘든 자리입니다. 연주자, 배우, 연출 등 스텝들과 의사소통에 능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음악감독은 연주자는 물론이고 연출, 안무가, 음향, 무대감독 등 모든 스텝들과 교류해야 하는 위치거든요.

작업 과정에서 보자면, 작품 의뢰가 들어왔을 때 대본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해요. 그래서 음악 배경을 갖고, 뮤지컬을 좋아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연극도 좋아해야 해요. 텍스트를 보고 어떻게 이야기가 연결되는지 파악할 줄 알아야 하거든요. 음악감독으로서 ‘말’에 관심을 둔다는 건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정말 배우들이 그 뜻을 실어서 노래할 수 있는지 가사 확인도 해야 하거든요.

피아노를 다룰 수 있으면 더욱 좋죠. 반주자가 따로 있겠지만 연습 과정에서 감독이 나서서 무언가를 요구해야 할 때도 있거든요. 모든 악기의 연주나 상태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악보도 편히 볼 줄 알아야 해요. 다양한 악기와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대한 지식도 필요합니다.

노래를 아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배우들이 워낙 훈련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노래를 가르칠 필요가 없지만, 목은 함부로 손 댔다가는 평생 다시 못 쓰는 악기잖아요. 그래서 감독으로서 노래를 배웠다면 훨씬 도움이 되죠. 배우 관리에서부터 밴드, 오케스트라의 음악 책임까지 다 맡아야 하는, 해야 하는 일과 필요한 사항을 이야기 하자면 끝도 없어요.





<심수일과 이순애>(1995)라는 작품에 참여했었어요. 이후 당시 제작사인 에이콤의 대표님이 인생의 프로젝트라며 <명성황후>를 만들겠다고 하셨죠. 기존에 보컬 코치가 있었지만, 제가 어렸을 때부터 뮤지컬을 접했기 때문에 이론적인 면 외에 은연중에 알고 있는 것들도 있었고, 또 제가 국악을 전공하기도 해서 기존의 코치 대신 <명성황후>의 음악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음악감독이라는 명칭도 없었고, 피아니스트, 보컬코치, 음악코치, 이런 식으로 소개가 되던 때였거든요. 그 작품에서 전 배우도 했었고, 또 음악 쪽도 다루고 있었는데 후에 공연 음악이 녹음에서 라이브로 갈 때 지휘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작품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절 보며 “아, 이게 음악감독이란 자리구나”하고, 뒤늦게 제게 음악감독 1호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았나 합니다.



제 기억이 있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으니까 음악은 제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에요. 큰언니는 한국 무용하러, 작은언니는 피아노 치러 가고, 전 어릴 때부터 첼로를 전공했죠. 살면서 딱 한번 비행학교에 가느라 방향을 틀었지만, 음악을 관두는 개념은 아니었어요. 늘 해오던 것이기에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음악이 내 인생에 없어서 안 된다는 생각, 또 음악을 평생 하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한 적이 없어요. 너무 자연스럽게 왔죠. 단지 학교 다닐 때 지역 청소년 오케스트라까지 총 세 군데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등 아주 바쁘게, 바쁘게,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또 어머니가 외국에 다녀오실 때 마다 그 나라의 악기를 꼭 가져 오셨어요. 그러면 그거 다 풀이 해보고, 이 소리 내보고, 저 소리 내보고, 목소리로도 내 보고. 새로운 도전을 찾아서 몸이 피곤할 정도로 달려온 건 기억이 나요. 새로운 것, 그걸 다 해봐야 속이 풀리는 성격이었거든요.



말러 교향곡 1번. 2, 3살 때부터 밤부터 들었어요. 어머님이 틀어주셨죠. 아침 햇살 뜨는 음악이잖아요. 불면증이 생긴 원인이기도 하고요(웃음). 어릴 때부터 스트라빈스키, 라벨과 같은 작곡가들을 더 좋아했어요. 이 작곡가들의 음악을 들으면 바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잖아요. 스토리가 있죠. 공연 보면 그림이 먼저 들어오고, 영화를 보면서도 음악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뮤지컬에서도 음악에만 감탄하는 게 아니라 음악과 가사와 상황에 감탄하는데, 제가 스토리를 특히 좋아해서인 것 같습니다.




음악감독은 캐스팅 이전에 작품 파악 단계부터 참여하는데, 라이선스 작품의 경우, 곡의 40%만 일단 파악을 합니다. 원작자들이 주는 생생한 정보를 잘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죠. 너무 파악을 해도 원작자들과 부딪힐 수 있습니다.

너무 어릴 때부터 음악을 접했고, 또 음악감독일을 해왔기 때문에 딱 보면 답이 바로 나와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거죠. 연습 과정은 내가 봐도 참 빠른 것 같아요. 연습 첫 1주일 만에 악보를 다 떼고, 그 다음부터는 연출이나 안무자에게 넘겨줘서 흐트러지는 것만 잡아 주면 되요, 예술성을 부여하면서. 첫 1주는 배우들과 저 혼자만 연습해요. 음악을 떼고 노래를 할 줄 알아야 안무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언제나 조심은 하지만, 다른 사람의 선을 안 밟으려고 해요. 전 뭐든 궁금한 사람이기 때문에 한 작품에서 제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늘 생각하려고 합니다. 내 눈에 뭐가 보여도 항상 두, 세 번 생각해서 이야기 하거나 아니면 이 악물고 다른 곳에 가 있죠.

굉장히 말을 심하게 할 때가 있어요. 거짓말을 원래 못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뭔가 아니다 싶은 건 못 봐요. 사람들이 다른 일 못해서 여기 오는 게 아니잖아요.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고, 하고 싶어도 살아남는 몇 명 만 있는 곳이 여기에요. 일방통행인 길이죠. 그렇다면 왜 힘들게 들어와서 딴짓을 하느냐는 거죠. 배우들이 연습에 집중하지 않거나, 연주자들이 준비를 안 해 오거나. 저는 꼭 세 번 실수를 보고 얘기하는데, 할 때는 아주 강하게 이야기해요. 그 사람의 아픈 구석을 아주 세게 찍죠.

하지만 최근에는 배우들이나 연주자들의 실력이나 자세가 많이 좋아져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다 알아들어요. 한국이 좋은 점이, 나이가 드니까 존중을 해줘요(웃음). 과거엔 배우들과 나이도 비슷해서 더 자주 부딪힌 것도 같아요.



디즈니의 <노틀담의 꼽추> 지난 18년간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연주자들한테 제일 많이 듣는 이야기는 “우리 <노틀담의 꼽추> 안 해요? 콘서트만이라도 안 해요?”에요. 연주라도 다시 해야겠다고요. 연주 하면서도 막 무언가가 마음 속으로 밀려와요. 진짜 좋아하는, 최고라고 생각해요.



<오페라의 유령>의 첫 한국 공연을 앞두고, 한국 제작사 측에서 우리에게 너무 겁을 줬어요. “피아니스트는 이런 음악도 알아야 하고, 연주자가 정말 잘해야 한다”. 그 때 대한민국을 다 뒤져서 오디션 반주자 2명을 데려다 놨더니 오히려 자기들이 놀라더라고요. 어떻게 그 곡을 그렇게 쉽게 연주하냐고요. 물론 내색은 안했지만, 당시 한국 수준을 지레 좀 얕본 것도 있었던 것 같고 영국이 워낙 대단하다, 라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그 이후 전 언제나 외국 크리에이터 팀이 오기 1주일 전에 배우들 모아놓고 미리 연습 시켜요. 당시에는 통역까지 제가 했어야 하니까 그렇게 미리 준비하는 것이 시간적인 측면에서도 경제적이죠. 그 이후로는 외국 스텝들이 “칼린이 하면 1주일 먼저 주고 우린 좀 늦게 갈게”가 되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잘 넘겨주는 것. 어머니나 제 선생님들이 모두 도재 교육 스타일이었어요. 특히 고양이를 기를 때 보면, 고양이 엄마가 “얘는 살려도 되겠구나”하고 엄청 정성을 들여 키우는 반면 “얘는 죽겠구나”하면 포기하고 딱 젖혀 버리죠. 그걸 보고 영원한 삶은 없구나, 하는 걸 일찍 깨달았어요. 그래서 잘하는 후배들이 많이 생겨서 더 이상 내가 안 해도 되었으면 좋겠어요.

한국에서 명인, 그 위치에 오르신 분들이 제자들을 꼭 자기 밑에만 두려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게 누르는, 그런 것도 많이 봐 왔는데 선생이라면 가장 많은 정보를 다음 사람에게 넘겨서 그 사람이 혼자 하산할 수 있게끔 만들어 줘야 하는 것이잖아요. 전 제자들을 떠나 보내는 스타일입니다.



이 일은, 어마어마하게 힘들고, 더 어마어마하게 재밌습니다. 음악감독으로서 체력이 좋아야 하고, 또 체력이 좋아야 해요. 체력과 정신력이 따라준다면 정말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확실할 수 있습니다.



공연을 하면서 멀리서 듣기는 하지만, 한번도 관객평을 찾아 본 적이 없습니다. 마니아들은 전문가도, 일반 관객도 아닌, 말 그대로 마니아들이고, 그 층대로 존중하지만, 그 때문에 어떤 영향을 받거나, 일을 덜 한 적도, 일을 더 한 적도 없습니다. 마니아들이나, 또 일반관객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보다는 자기가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그 작품이 요하는 것에 충실하고 진실했을 때 부끄럼이 없는 것이거든요.

예술은,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에요. 돈과 명예를 얻으려면 다른 일을 해야 해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고맙게도 이 일을 할 수 있게끔 뭔가가 선택을 해 줬어요. 그렇게 선택 받은 자로서 예술을 한다면, 그걸 되돌려 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습실에도 붙어 있는 문구인데, “작품에 충실해라” 저는 그것 하나로 달려가고 있어요. 공연 후 인사하러 뒤돌아봐도 객석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아요. 저는 누가 관객이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을 때 떳떳하게 잘 수 있습니다.



정리 :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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