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파트를 맡고 있는 공연쟁이 희곡을 극문학이라고 하지만, 서점에 가면 희곡집은 예체능, 연극 코너에 있어요. 극작가는 문학을 다루고 있는 부분을 맡고 있을 뿐이지, 문학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이나 시는 누구든지 읽을 수 있지만, 희곡은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 가야지만 빛이 나는 것이라 ‘공연’을 기본으로 하는 글이지요.

희곡이 나와야 공연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기 때문에 오히려 협력과 조율 속에서 가장 많은 것을 내 놓아야 하고, 가장 많은 손해를 봐야 하는 사람이 극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무대화 과정에서 타당성 있게 상대를 설득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확신이 없다면 버려야 되며 상대 스텝의 재주가 더 많다면 그걸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글을 쓰는 일 보다 극장에 나가서 배우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 하고 소통하며 무언가를 찾아주는 것에 더욱 가까운 사람이에요.



공연 마니아 중학생 때 집 근처에 롯데월드 예술극장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돈키호테> <레미제라블> <가스펠> 등 명작이라는 명작은 다 했는데 밥 먹고 군것질 할 돈 모아서 공연 보러 가는 게 일이었지요. 나중에는 배우들이나 스텝들이 알아보고 초대권을 줄 정도였어요. 그러다 고등학생 때 성당 행사 차 혜화동에 가게 되었는데, 롯데월드 예술극장에서만 공연을 보는 게 아니었음을 깨닫고 대학로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오태석 선생님, 한태숙 선생님 작품을 다 보러 다녔지요.

배우가 되고 싶었으나 입시에서 연극영화과에 다 떨어지고 나니 어머니가 문예창작과를 추천하시더라고요. 학교 다닐 때 글짓기 대회 나가서 장관상을 받기도 했거든요. 서울예대 문창과를 가려고 안내 책자를 보던 중 극작과를 발견했습니다. 극작과가 어떤 곳인지 몰라 과사무실로 전화를 했더니 글도 쓰고 연기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여길 가야겠다, 하고 입학했죠.

첫 수업에 오태석 선생님께서 들어오시는데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질렀어요.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오태석, 오은희 선생님이라고 늘 말했었는데, 그런 분을 직접 뵈니까, 아, 여기가 천국이구나, 이게 작가가 되라는 운명이구나, 하고 느꼈고, 그 때 이후로 마음이 바뀐 적이 없습니다.



창작 영감
글을 쓴 지 오래되면 신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전부터 했던 이런 저런 생각 중에 어떤 게 좋을까, 운명처럼 그 분이 오시는 것처럼 딱 꽂히는 이야기가 있지요. 우연히 신문 기사나 책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하고요. 스크랩 북을 만들어서 두기도 하고, 눈에 잘 띄는 곳에 책을 꽂아 두기도 해요.

<왕세자 실종사건>은 ‘대통령의 아들이 없어지면 어떤 일이 생길까? 온 국민이 범인이겠지?’하는 호기심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으로 하자니 청와대 비서실도 나와야 하고 너무 복잡해서(웃음) 조선시대로 가져갔지요. 초반엔 왕세자가 사라져서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후궁들이 자기 아들을 내세우려는 일종의 정치극에서 출발했는데 쓰는 과정에서 조금씩 이야기가 바뀌었죠.



<청춘 18대 1>은 ‘가네꼬 후미꼬’라는 책을 읽고 떠올렸어요. 그 책에 연인이었던 일본인 가네꼬 후미꼬의 가슴에 독립 투사 박열이 손을 얹고 감옥에서 찍은 파격적인 사진이 있었는데, 저 여인은 독립 운동을 하는 조선 남자 박열의 어떤 면을 사랑했던 걸까, 그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제목 먼저 정하고 시작 제목부터 정하고 글을 씁니다. 제목이 곧 형식이라는 쪽이죠. 그래서 <죽도록 달린다>는 죽도록 달려야 되는 거고, <왕세자 실종사건>은 왕세자가 사라진 이야기이며, <릴-레-이>는 한 여자를 두고 남자들이 말 그대로 릴레이로 폭력을 행사하는 이야기입니다.

제목을 정하고 나면 서재형 연출님과 그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눠요. 그리고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 한에서 주변 사람들과 많이 이야기 하고 묻지요. 제가 바라보는 세상이 전부는 아니고, 또 각자가 생각하는 것, 일화, 에피소드들도 얻게 되고요.

끊임 없는 퇴고 퇴고를 많이 합니다. <죽도록 달린다>는 80고가 넘었고, <왕세자 실종사건>도 60고가 넘었어요. 한 두 문장을 수정하는 게 아니라 장면 자체가 변하고 주인공도 바뀝니다. 열심히 하는 배우들은 분량이 늘어나고 그렇지 않은 배우들은 점점 숨게 되죠. 작품을 수정하다가 어느 정도가 되면 서 연출님이 무대를 그려주시는데, 그 무대를 상상하면서 글을 쓰니 글과 형식이 많은 부분에서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요. 서 연출님이나 저나 무척 치열해요. 둘 다 극성스럽기 때문에 장면이 누추한 게 싫고, 배우들이 초라해지는 게 싫으니까 어떻게든 뭘 만들어야 하고, 그래서 새로운 형식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예전에 어느 작가분이 “성공하려면 본인이 못하는 걸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선택을 잘해서가 아니라 거절을 잘해서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로맨틱 코미디는 작업 의뢰가 들어와도 거절합니다. 저는 속이 경상도에 가까운 남자여서(웃음) 알콩달콩한 재미는 재주 있게 풀어내지 못하는 것 같아요. 반면에 역사를 조금 더 우리 식으로 만들어 내는 것엔 작가로서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을 때 웃는 것 보다는 우는 쪽에 더 가깝고, 비참함을 많이 느껴서 인지, 밑 정서들이 좀 더 강하게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를 볶는 스타일이고 어릴 때도 조금 삐뚤어진 시선,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쪽에 가까웠거든요. 약간 억눌려 있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약간 뽀송뽀송하게 만드는 게 성향적으로 맞는 것 같습니다.



꿈이 제 작품으로 배우가 상을 받는 겁니다. 배우가 잘 보이게 써 주는 작가가 제일 잘하는 것 같고, 저도 그렇게 하려고 해요. 배우에게 대사를 몰아주는 식이 아니라, 관객이 봤을 때 정말 배우를 사랑하고 싶다고 느낄 수 있게요.

그래서 관객들이 한 순간도 배우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싶어요. 그 말은 공연에서 눈을 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공연을 볼 때 관객들은 배우의 정서를 따라가는 거지, 조명 큐가 어떻게 바뀌는지, 무대 세트가 좋은지 안 좋은지를 보는 게 아니거든요. 관객들이 분명히 집중하려는 태도가 보이면 그 장면은 잘 된 거고, 그렇지 않으면 수정해야 합니다. 관객들에게 가장 많이 배웁니다.




서재형 연출님과 “우리 간이 너무 혹사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공연이 잘 되면 그 간이 다시 회복될까?”하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연출님은 회복이 된다고 믿으시지만 저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작품을 만드는 과정, 그 후의 고통들이 좋은 결과로 보상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열 명이 칭찬해도 한 사람의 나쁜 말이 가슴에 꽂히잖아요. 그래서 작가를 거부하려고 다른 길로도 가 봤고, 포기하려고도 했는데 결국 다시 하게 되더라고요.

저희들끼리는 ‘신 내렸다’고도 해요. 어쩔 수 없는 운명이죠. 하지만 상처받는 고통보다, 내가 이 일을 정말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결국 더 큰 것 같습니다. 연습실에 나와서 배우들 보고 작업을 시작하면 마음이 또 편해져요.

얼마 전 뮤지컬어워즈에서 <왕세자 실종사건>이 창작뮤지컬상을 받았는데, 그 땐 정말 상을 받는다는 게 이런 기쁨이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좋아할 수 있잖아요.



오태석 선생님 작품은 다 충격적이었어요. 이윤택 선생님의 <오구>는 말 그대로 저를 쥐락펴락 했는데, 대학생 때 보면서도 ‘아, 이런 연극이 세상에 있구나’ 하고 무척 재미있게 봤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을 꼽으라면 로버트 윌슨과 피터 브룩을 이야기 했어요. 유학하며 로버트 윌슨을 전공했고, 특히 피터 브룩의 <햄릿>이 기억에 남죠. ‘저런 비주얼이 있구나’ 하면서요. 지금은 예전만큼 강렬하게 좋아하진 않습니다.



공연 연습 중 갑자기 서 연출님이 배우들에게 대본을 펴라고 하시더니 빨간펜으로 대사를 그으면서 걷어내시는 거에요. 저도 있었는데 전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그어, 빨리 그어” 그러셨죠. 같이 차를 타고 연습실에 왔는데 그때도 아무 말씀 없으셨으니 저도 당황스럽고 화도 나고, 배우들은 저희 둘 눈치 보느라 덜덜 떨고요.(웃음) 가방 들고 나가 버렸어요.

집에 와서 연출님에게 더 혼났어요. 그간 연습 하면서 저에게 굉장히 많은 기회를 줬는데 작가가 눈치를 못 챈 것이라고요. 작가가 자기 생각에만 빠져서 다른 생각을 못하고 있었으니 귀가 썩었다고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연습 중간에 “이 부분이 불편해요, 불편해요”라고 여러 번 말씀하신 게 생각나더라고요. '아, 진짜 내 귀가 썩었구나'(웃음)

그 후 다시 연습실 나가서 짤린 대사 하나라도 찾아줘야겠다, 눈에 불을 켜고 연습 보고 생각하고 틈만 보이면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요?” 하고 이야기 했습니다. 서 연출님이 굉장히 냉정하세요. 배우들은 저희들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놀랐지만, 부부로 같이 사는 모습에도 계속 놀라고 있어요. 연습실에서 대본 들고 싸우고 소리지르고.(웃음) 그만큼 둘 다 치열하죠.



극작가에겐 ‘보조’가 없다. 연출에겐 조연출이 있고, 음악감독이나 안무가에게는 조음악감독이나 조안무가가 있지만, 극작가에게 보조작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작가의 몫을 온전히 지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공연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바닥부터 배우라고 이야기 해요. 저는 음악 오퍼레이터도 해 보고, 포스터도 붙여 봤고, 표도 팔아 봤어요. 파리8대학 석사가 표를 판다고 소문이 나니까 한 선생님이 한태숙 선생님의 <서안화차> 드라마투르그로 소개시켜주셨고, 거기에서 서 연출님을 만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거에요.

세상에 헛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뭐라도 하나 깨닫고, 그것을 통해서 배우게 되죠. 요즘에는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서 본인이 정말 이 악물고 노력만 하면 좋은 극장에서 작품 올릴 수 있는 기회가 많습니다.


정리: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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