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최대 공연예술축제인 ‘페스티벌 도쿄(F/T)’가 올해는 11월 1~30일 열렸다. 최고의 화제작은 연출가 니나가와 유키오가 이끄는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의 <까마귀야, 우리들은 탄환을 넣는다>. 고희를 훌쩍 넘긴 노인들 40여명이 무대에 등장한다.

유명 배우 한 명 없지만 이 작품은 지난해 5월 도쿄 인근 사이타마예술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일본의 여러 지역 극장은 물론 해외에서도 잇따라 초청을 받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 있는 일본문화회관에서 공연된 이후 올해 홍콩과 파리에서 다시 무대에 올랐다. 특히 지난 12월 8~12일 파리 공연은 피나 바우쉬의 신작이 늘 공연되는 등 저명한 극장인 ‘떼아트르 드라빌’의 초청으로 이루어져 현지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까마귀야, 우리들은 탄환을 넣는다> 일부장면

평균연령 75세의 노인극단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

한국에서도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무사시> 공연으로 팬이 많은 니나가와는 일본을 대표하는 연출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가부키를 연상케하는 화려한 스펙타클의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비극 연출로 정평이 나 있다. 현재 일본에서 사이타마예술극장과 도쿄 분카무라 시어터코쿤의 예술감독을 겸임하고 있는 그는 7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년 신작과 재연을 포함해 평균 9~10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릴 정도로 정력적이다.

노년기에 접어든 그가 가장 애착을 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다. 2005년 11월 사이타마예술극장의 예술감독으로 내정된 그는 연극 경험이 없는 노인들을 배우로 육성하는 극단을 창설하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사이타마예술극장은 당혹스러워 했지만 세계적인 거장의 요구인 만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2006년 2월 노인극단 설립을 위해 5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단원 모집 공고가 나갔다. 니나가와의 위상 때문에 언론이 앞다퉈 보도하긴 했지만 1,226명이나 응모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 20명을 뽑으려고 했던 니나가와는 극장과 협의해 오디션에서 46명을 선발했다. 당시 최고령자는 80세였고, 평균 연령은 66.7세였다. 경력과 출신도 다양해서 기자, 아나운서, 공무원, 회사원, 교사, 가정주부 등의 직업을 거쳤다. 이들은 배우에 대한 꿈을 평생 가슴에만 품고 살았으나 마침내 열정을 발산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이 실버 극단, 즉 노인극단의 이름은 “실버를 뛰어넘는 골드”라는 의미에서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로 정해졌다.

니나가와는 노인극단의 창설 이유에 대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다양한 경험과 수많은 감정을 헤쳐나온 증거”라면서 “노인들이 그 개인사를 바탕으로 신체표현이라는 방법을 통해 새로운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오디션에서 선발된 노인들을 대상으로 1년동안 연기를 비롯해 발성, 무용 등의 강의가 계속됐다.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는 중간 발표회를 두 번 가진 후 2007년 6월 일본 극작가 이와마쓰 료의 <배 위의 피크닉>으로 첫 정식 공연을 가졌다. 호텔에서 구조 조정된 사람들이 새로 건립된 리조트에 취직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난민선을 도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현대사회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첫 공연에 대한 언론, 평단과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다. 고용 불안 등 암울한 현대 사회를 풍자하는 이와마쓰의 희곡도 좋았지만 무대에 선 노인 배우들의 자연스런 존재감과 사실적인 연기가 큰 감동을 줬기 때문이다. 니나가와의 지도를 받은 노인 배우들은 배역에 자신들의 경험을 온전히 투영시켰다.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는 이후 매년 정기공연을 올리고 있다. 작품은 이와마쓰를 비롯해 마쓰이 슈, 시미즈 구니오 등 일본 극작가들이 현대 사회를 소재로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2013년 공연한 <까마귀야, 우리들은 탄환을 넣는다>는 노파들이 폭탄을 던진 혐의로 재판을 받는 손자들을 구하러 법정에 난입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일본에서 실험연극이 득세하던 1971년 초연된 이 작품은 노파들이 검사와 판사를 발가벗겨 처형하는 등 드라마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의 노인 배우들은 젊은이 못지 않은 에너지로 무대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관객들은 이들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11월 페스티벌 도쿄에서 <까마귀야, 우리들은 탄환을 넣는다> 공연 당시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의 단원은 타계, 질병 등으로 인해 39명이 남았다. 단원들의 평균 연령은 75.6세이며, 최고령자는 88세다.

일본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노인 국가’다. 2013년 OECD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가 무려 25.1%나 되는 초고령 사회다. 수명 연장에 따라 노년기의 삶의 질과 행복은 사회적 차원의 문제가 됐다. 노인극단인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는 바로 초고령 사회에서 의미있는 모델로서 시사점이 많다.

사실 일본에서 공연계의 주요 관객은 오랫동안 중산층 이상의 노인들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공연 시간대는 노인들이 선호하는 낮 시간이 많다. 연극이나 뮤지컬의 경우 전체 스케줄 가운데 절반 정도나 될 정도다. 그리고 최근 이런 노인 관객을 타깃으로 노년의 사랑과 죽음 등을 소재로 한 작품도 점점 많이 나오고 있다.

나아가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처럼 노인들이 단순히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에서 벗어나 예술을 창조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아티스트로서도 활약하게 됐다. 노인 배우들은 니나가와가 만드는 다른 작품들의 엑스트라로 틈틈이 출연하더니 최근에는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까지 캐스팅되기에 이르렀다.

사실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에 앞서 노인극단이 만들어진 적이 있다. 2004년 일본 간사이 지방의 소도시인 미노에서 시민 강좌 ‘60세 이상의 연극 입문’이 계기가 되어 아마추어 노인극단 ‘스즈시로’가 만들어졌다. 극단 스즈시로는 2006년 처음 연극을 선보인 이후 2010년 뉴욕의 준 해벅 극장에서 영어로 작품을 공연하기에 이르렀다. 시민강좌의 워크숍에서 시작해 뉴욕 공연까지 해낸 극단 스즈시로에 대한 다큐멘터리 <화려한 무대는 브로드웨이에서…실버 극단의 도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노인극단의 붐을 일으킨 것은 뭐니뭐니해도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다. 아무래도 니나가와가 열정적으로 추진한 덕분에 언론에 자주 보도됐고, 자연스럽게 벤치마킹의 대상이 됐다. 2006년 군마현과 도쿄를 시작으로 매년 일본 지역 곳곳에서 노인극단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도쿄에서 깃발을 올린 평균연령 80세의 극단 ‘파라다이스 이치자’는 일본의 저명한 연출가인 류잔지 쇼를 비롯해 유명 극단 문학좌 대표를 맡기도 했던 90세의 연출가 이누이 이치로 등 원로들이 참가해 화제를 모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2011년에는 전국 16개 노인극단이 참가한 제1회 전국 시니어 연극대회가 도쿄에서 개최됐다. 이 축제는 격년제로 개최돼 2013년 제2회가 열렸고, 2015년 3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제1회, 2회 전국시니어연극제 포스터


 2011년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기념사진 찍는 파라다이스 이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