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빅토리아 팰리스 시어터의 로비는 관객들로 북적였다.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방금 폭발한 화산처럼 후끈한 기운은, 분명 기대감으로 부푼 관객들의 표정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지난 3월 31일로 웨스트엔드에서만 1700회 무대를 돌파하며 공연 4주년을 맞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여전히 뮤지컬계 독보적인 핫 이슈가 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광경이다.

영국의 북부 탄광촌을 배경으로 가난한 광부의 아들인 소년 빌리가 남다른 재능을 깨닫고 발레리노의 꿈을 키워 간다는 감동스토리는 2000년 영화로 먼저 만났다. 선 굵고 담백한 영국의 정서와 우울한 회색빛 배경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 작품의 매력은 2005년 뮤지컬로 다시 태어난다.

영화의 감독과 각본을 맡은 스테판 달드리(Stephen Daldry)와 리 홀(Lee Hall)이 그대로 뮤지컬 작업의 중심이 되었으며 새로 합류한 작곡가 엘튼 존(Elton John)은 음악으로 날개를 달아줬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이 영국을 비롯, 호주와 미국으로 훨훨 날아가 마음껏 활개를 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빌리’에 있다.


빌리 역을 맡은 10대 초반의 어린 배우들은 저마다의 탄탄한 기량으로 까다로운 오디션을 통과하기도 했지만,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특별히 이 작품만을 위해 세워진 빌리 스쿨에서 노래와 춤 등의 트레이닝을 받는다.

2009년 9월 현재 웨스트엔드 무대에 오르고 있는 빌리들은 로열 발레 스쿨의 주니어 단원인 올리 가드너(Ollie Gardner)에서부터 미국 주니어 댄스 챔피언 태너 플루거(Tanner Pflueger)등 발레와 재즈, 탭, 현대 무용을 이미 총 망라한 작은 거인들이다. 이날 무대에 오른 태너 플루거는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이끌어 가야 하는 자신의 배역을 완벽히 소화해 내 그야말로 주역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고난위도 발레 동작과 탭 댄스 등 전문 무용수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는 뛰어난 테크닉의 안무는 물론이거니와 미래의 성인 빌리와 앙상블을 이루는 플라잉 장면은 그 하나로 멋진 예술이 되어 감탄을 자아낸다. 공연 후 커튼콜 무대에서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손 끝 하나에까지 에너지가 넘치는 빌리를 보노라면 ‘꼬마, 소년, 아역’ 등의 타이틀이 그에게 얼마나 촌스럽고 편협한 수식어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인 면을 도움닫기 한 작품의 완성도는 탁월한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완성된다. 자칫 댄스 기술에만 치우칠 수 있는 빌리는, 세상을 떠난 엄마, 살기 위해 파업 현장에 뛰어드는 아빠와 형, 그리고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 사이에 우두꺼니 놓여진 한 소년의 슬픔과 고뇌를 놓치지 않는다. 춤 추고 있는 자신의 몸 동작 하나하나에 무언가를 느껴가는 소년의 경이로움, 발레를 반대하는 아빠를 뒤로 하고 미친듯이 절규하며 춤 추는 모습을 통해 소년의 작은 가슴 속에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의 불꽃이 그대로 객석으로 전해진다.

빛나는 조연들이 가득하다는 것도 <빌리 엘리어트>에서 빼 놓을 수 없다. 치매로 기억력이 오락가락하는 빌리의 할머니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섹시하기까지 하고, 빌리 친구 마이클과 발레교습소 선생 윌키슨, 그녀의 딸 데비는 또렷한 개성으로 무장, 작품을 더욱 맛깔지게 만든다.


두 눈을 사로잡는 현란한 조명과 귀를 자극하는 음악이 아닌, 담백한 무대 장치와 마음을 두드리는 뮤지컬 넘버는 이 작품의 기본을 더욱 탄탄히 살리고 있다. 파업 현장에 뛰어든 노동자와 이들과 대치하는 경찰들, 그 사이에서 발레 교습을 받는 아이들이 한 무대에 어울려 노래하는 ‘Solidarity’는 한 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 복합적인 상황과 상징을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뿜어낸다.

내년 여름 비영어권 최초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한국 무대에 설 예정이다. 얼마 전 오디션을 통해 예비 빌리와 마이클들도 선발되었다. 1년간의 숙성 과정 후, 웨스트엔드, 브로드웨이, 그리고 호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도저히 주체 못할,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불꽃 같은 느낌’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게 될지 기대해 본다.


글: 런던=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매지스텔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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